시차의 건축
김경주
오르골이 처음 만들어 질 때 유리통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은 음악에 고이는 태풍이 되고
오르골에 조금씩 금이 갈 때 유리통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은 그 음악을 태풍으로 만든다
립파이를 먹고 싶을 때에는 립파이를 먹고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 가고 싶을 때는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간다
어떤 여행지에서는 살구와 자두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오전엔 박하향이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끄러 가는 소방관을 보았고
오후엔 소방관이 박하사탕처럼 건물 속에서 녹는다
수업시간엔 세계지도를 펴 놓고 먼 도시들의 위도와 경도를 외웠는데
수업이 끝나면 독사를 잡으러 가기 위해 검은 봉지를 주우러 다녔다
밤엔 나무에 몰래 기어올라 앉아 있는 느낌보다 나무에서 떨어진 느낌으로
책을 본다 새벽엔 종이비행기보다 종이배를 더 많이 접었다고 고백하는 느낌
종이배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 이봐 네 곁에 난 오래 앉아 있었다구’
내가 공책에 갈겨 쓴 아주 많은 글자들이 밤에 지우개 속으로 모두 들어가 사라진 날의 느낌
인도향을 선물받은 날 다리를 좀 절었고 시차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집에서만 지내는데도 망각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데에도 기억은 수십 종의 식물을 달고 간다. 어쩐지 너의 여행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많은 종種의 연필이 필요할 것 같아서 흑말을 탈까? 백말을 탈까? 청기를 들까? 백기를 들까? 여행은 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침묵의 차이 같아...
내 현기증이 조금 잘 팔리는 이유는 ‘졸음과의 싸움’ 같은 것인데
네 수증기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마을 속에서 언제나 네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 거야 과민한 날 합격통지서를 받은 것처럼, 아침에 손톱을 자르고 저녁에 손톱을 잃어버렸다고 우는 아이처럼, 부모의 섹스를 처음 훔쳐본 날의 몽연함처럼 나는 <붉은 책 암송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고 온 엄마를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유산같은 건 필요 없어요. 대신 엄마의 멀미를 내게 다 주세요’
누군가 내게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넌 고향을 꽃다발처럼 평생 벽에 거꾸로 말릴 생각이니?’
누군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강아지 사료 한 알이 나옵니다.’
유리창에 입김으로 그려놓은 건축들이 흘러내린다
그건 시차를 이해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머릿 속의 물방울들
배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스무살도 안되서 양미간을 찌푸리고 나쁜 감정에 진학하기 위해
나는 침묵의 보병이 되었다. 부재의 영역에서 말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할 뿐이고
시는 그곳을 오고 가는 내 인종人種에 불과하다. 간직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자신의 시차를 돕기를. (*)
--------------------
작가 소개
김경주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꽃 피는 공중전화」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을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기담』이 있다.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작업실 '나는 공항(flying airport)'에서 다양한 인디문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