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흔躊躇痕
김경주
몇 세기 전 지층이 발견되었다
그는 지층에 묻혀 있던 짐승의 울음소리를 조심히 벗겨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발굴한 화석의 연대기를 물었고 다투어서 생몰 연대를 찾았다
그는 다시 몇 세기 전 돌 속으로 스민 빗방울을 조금씩 긁어내면서
자꾸만 캄캄한 동굴 속에서 자신이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굴 밖에선 횃불이 마구 날아들었고 눈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가진 돌들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법인데 그것은 돌 속으로
들어간 몇 세기 전 바람과 빛 덩이들이 곤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썩지 못하고 땅이 뒤집어져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일 시간에 귀속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서로 전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화석의 내부에서 빗방울과 햇빛과 바람을 다 빼내면
이 화석은 죽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바람은 죽으려 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똑같은 울음소리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기담』에서 전재. (김경주,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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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경주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꽃 피는 공중전화」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을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 기담』이 있다.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작업실 '나는 공항(flying airport)'에서 다양한 인디문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