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과 의학의 세기
조연호
정념(情念)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망자(亡者)의 일을 산 자의 까닭에게 남겨놓을 수 있다면 삶은 불분명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낯설 리 없는 것이다. 삶은 죽은 자에게 한정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많은 심연으로 현상을 위대한 웅변가로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친애하고 있다. 각별한, 그리운 등의 언사로 모든 문제를 복잡하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망상을 경고하는 행복으로 웅변가는 대중의 불행을 겪는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도 이 마술은 풀릴 것이다. 그것은 어떤 분석으로도 또 다른 분석을 낳을 수 있지 않을 것 같은 옛이야기 속의 목적이나 - 단순히 복음의 비유를 읽는 것으로 - 영혼과 그것의 입법자로 - 단순히 후대를 신화에 선행하지 않는 자리에 놓아버린 자의 대화를 경청하는 것으로 - 가능하다. 마술의 힘은 그것의 저주에 걸린 자가 풀리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강력해 보였던 것이지 마술의 기술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환영이 서로를 반복적으로 추월해가는 기이한 사건이 나에게로 - 이미 내 자신과의 일치감을 박탈당한 나에게로 - 도약한다면, 가장 느슨하게 결합된 종간(種間)의 관계라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공유하기 시작한 광경이 의학이 돌출되는 시기의 의학에 있어 질병의 유해성으로 배척되는 것은 마치 기록 속의 고대어(古代語)처럼 사람이 사람에서 자신의 문명 모두를 잃어버리는 소멸의 자생성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또한 지성이 그 어떤 정신보다 우월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환희와 결부되어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의 정신은 그 자체로 체험보다 더 회고적인가?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말해지기 위해 자신의 참회로 돌아가는가? 내적인 속박 없이 고유성이 가능하며, 윤곽이 형상에 기반 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은 결국 착각 속에서 참되게 길을 잃는 일일 뿐이다. 사랑이라는 괴물과 싸우며, 이 뼈와 가죽을 딛으리라는 용기가 부족하지 않다면, 육신은 그것대로 합당한 방법으로 피상(皮相)을 잃어가는 진실한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자리에서 이성으로 쌓여간다는 것, 정념으로 앙금진다는 것, 그런 의학을 마술로 정정할 기회가 영원히 박탈된다 하여도, 나는 그것들에 의해 하루를 하루 이상으로 패배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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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조연호
나는 시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 시인이라는 자각이 시 작품이라는 귀납적 성과를 못 따라가기에 생기는 것이 작가적 양심의 위치라면, 내가 시인이라는 자각은 부끄럽게도 아직 많지 없다. 그런 까닭에 시에 대해 경외할 수 있었다. 많은 부분 나에 대해 역겹지만, 하나 다행한 일은 전통적인 걸 중시하고 옛것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정도? 그런 태도가 기품과 격식을 낳으리라고 염원하고 있지만, 운명을 비극의 자기 희열로 반성한 그리스 사람들처럼 나는 결코 서정적 합창에서 비극으로 건너오는 모험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위치를 이해하려고 자기 운명과 교역하는 인간상만큼은 열쇠로 기능하는 것이지, 그 열쇠에 맞는 구멍을 가진 문으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그 문은 영구히 파멸되었기에. 그래서 남의 영광이 나의 몰락 단계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괴로우면서도 엿볼 용기를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시적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