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사람
이영주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생일은 미리 말해주자. 젖은 바람 부는 계절에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오랫동안 편지를 쓴다. 몸을 보니 여자였구나. 상점 주인은 창밖의 간판을 세다가 저무는 사람. 단 한 명의 노파도 없는 비 오는 골목으로 음악을 흘려보낸다.
지느러미를 감추고 들어와야 해.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림자를 보니 물고기구나. 상점에는 푸른 비늘이 가득 찬다. 그녀가 달력을 넘기는 동안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 노파를 보고 싶은 계절이야. 생일을 견디며 물고기들이 모서리에 지느러미를 비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 물고기인 줄 알았는데 장화를 벗고 보니 딱딱한 계단이구나. 그녀는 문밖의 발들을 바라보다 밤늦도록 저문다.
고무장화를 신자. 태풍이 오기 전에 생일을 미리 말하자. 바람이 젖은 달력을 찢는다. 계단 밑, 붉은 웅덩이 속에 머리를 빡빡 민 노파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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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이영주
“오늘내일 한다. 두번째 시집이 나오는 시간. 만삭과 같네. 오늘내일. 시를 써서 그나마 이런 사람이 되었다. 시를 쓰지 않았으면 어떤 순간으로 흩어졌을까? 유기체가 될 수 있었다, 시를 써서. 그러니까 그 전에는 규정할 수 없는 골목이었다, 내가. 한밤, 썩은 고기 냄새가 풍기는 어두운 골목에서 나는 늘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제 좀 악문 이를 버리고 입술을 내밀어 보려고 한다, 나는. 쭈욱 내민 입술 말야.”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