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세문경
안현미
언젠가 나는 거울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창 밖엔 벚꽃이 흐드러지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불어온 낯선 바람으로 봄밤의 골목은 온통 벚꽃향기로 가득합니다. 저 골목으로 뛰쳐나가면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었던 초능력을 상실한지 너무 오래. 다시 봄인데 나는 죽은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마음으로 연모했으나 끝내 이 생에서는 인연을 맺을 수 없었던 정인이 알뜰하게 들여다보던 청동거울을 품고 무덤 속으로 들어간 사람인 것만 같습니다. 활활활 하얗게 벚꽃이 피어 나는 밤입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밤입니다. 오래 전 어느 날 나는 당신과 함께 봄밤의 낙산 성곽길을 내려와 이렇게 중얼거렸던 적 있습니다.
올 봄엔 벚꽃이 피면. 그게 모두 하나하나의 마침표처럼 보일 것 같아. 후두둑. 떨어지는 마침표 아래서. 나는 아무도 몰래 울게 될 것 같아. 그리고는 말간 얼굴로. 내 몸 속에 나이테 하나를 더 간직하겠지. 그 속에 앉아 백 년쯤 기다리는 여자가 될 테야. 말줄임표의 탄창을 닦으며. 무섭지?
언젠가 나는 거울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이른 냉면을 먹고 낙산 성곽길을 내려오던 봄밤, 당신이 내게 건넨 다뉴세문경을 닮은 거울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기하하적인 무늬에 대하여,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있던 그 거울에 비쳤을 오래된 어둠에 대하여, 오래된 두려움에 대하여, 그 거울에 새겨진 삼각형문이 주술에서는 재생을 의미한다고 말해주던 당신의 옆 얼굴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목숨 걸고 사랑하고 있는 문학이 그 거울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추는 다뉴세문경 같은 게 아닌가 한다던 그 말에 대하여…
언젠가 나는 거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오늘밤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입니다. 다시 봄입니다.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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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안현미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사막에서도 살아 돌아올 여자’ 라고. 또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입 닥치면 신비로와!” 그러나 또 누군가는 내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다 한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소개라는 게 당최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기적처럼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번째 시집 『곰곰』에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들에 대한 아주 사적이지만 시적인 시들을 묶었고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에는 사랑했으나 결국에는 이별해야 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과 함께 사라져간 당신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했다. 세 번째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시집이 좋다 하고, 누군가는 첫 번째 시집이 더 좋다 한다. 그들 모두에게 세 번째 시집이 더 좋을 거라고 허풍 떨고 싶지만 나는 겨우, 쓸 뿐이다. 매일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