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臥遊)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 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 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 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 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이별의 재구성』에서 전재 (안현미,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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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안현미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사막에서도 살아 돌아올 여자’ 라고. 또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입 닥치면 신비로와!” 그러나 또 누군가는 내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다 한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소개라는 게 당최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기적처럼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번째 시집 『곰곰』에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들에 대한 아주 사적이지만 시적인 시들을 묶었고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에는 사랑했으나 결국에는 이별해야 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과 함께 사라져간 당신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했다. 세 번째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시집이 좋다 하고, 누군가는 첫 번째 시집이 더 좋다 한다. 그들 모두에게 세 번째 시집이 더 좋을 거라고 허풍 떨고 싶지만 나는 겨우, 쓸 뿐이다. 매일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