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곰곰』에서 전재 (안현미,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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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안현미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사막에서도 살아 돌아올 여자’ 라고. 또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넌 입 닥치면 신비로와!” 그러나 또 누군가는 내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다 한다. 그러니까 나에 대한 소개라는 게 당최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싶다. 그럼에도 나는 기적처럼 두 권의 시집을 냈다. 첫 번째 시집 『곰곰』에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던 시절들에 대한 아주 사적이지만 시적인 시들을 묶었고 두 번째 시집 『이별의 재구성』에는 사랑했으나 결국에는 이별해야 했던 시간들과 그 시간들과 함께 사라져간 당신들에 대한 기억을 기록했다. 세 번째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시집이 좋다 하고, 누군가는 첫 번째 시집이 더 좋다 한다. 그들 모두에게 세 번째 시집이 더 좋을 거라고 허풍 떨고 싶지만 나는 겨우, 쓸 뿐이다. 매일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