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면서 번져가는
김언
입술과 항문이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
이것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장면에 대해서
농담에 대해서
무의식도 무뇌아도 아닌
이 이상한 아이들에 대해서
저마다 주장하는 앵무새와
평자들에 대해서
잡지와 휴지통에 대해서
가장 얇은 시집의 희소가치에 대해서
우스꽝스러운 한 줄에 대해서
한 줄 건너 세계에 대해서
지구 내부의 어떤 무관심한 침묵에 대해서
따지고 보면 한 덩어리
실험에 대해서
폭발하는 활자에 대해서
아직도 내가 살고 있는 전쟁에 대해서
할 말 없음과 약간의
웃음에 대해서
갈수록 불필요한 문장에 대해서
한 줄씩 지워가는 신뢰에 대해서
연기로 똘똘 뭉친 이 의리에 대해서
아무 잘못도 없다 선언하는
담배에 대해서 담배가 키워놓은
한 줄의 공상에 대해서
망상에 대해서
지우면서 번져가는
오늘 저녁의 메뉴에 대해서
여전히 알지 못하는
그 입술과 항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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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언
1992년 공대에 들어갔지만, 공학도가 될 수 없었던 아웃사이더는 결국 시인이 되었다. 1998년 <시와사상>을 통해서다.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을 냈으며 두 권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숨쉬는 무덤』(2003)과 『거인』(2005). 나머지 한 권(『소설을 쓰자』)은 작년에 나와서 그럭저럭 읽히고 있다. 제목처럼 소설을 쓸 각오는 아직 못하고 있다. 다만, 이다음 시집을 채울 시의 골격을 암중모색 중이다. 발표는 많이 하고 있지만, 상상의 틀을 세우지 못한 시는 아무리 발표해도 허기진 얼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민이다. 시의 골격이자 상상의 틀을 다시 세우는 일에 대해, 한편으로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 가는 얼굴에 대해 또 무엇을 쓸까, 세우면서 허물어져 가는 것의 극적인 상황이 한 편 한 편 시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쓴다. 그 고민과 더듬거림과 불확실한 어떤 고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