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가장 친근한 난해시
김언
오랜만에 퐁주의 시집을 펼쳐본다. 프랑시스 퐁주. 국내에서는 시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시인. 1899년 프랑스 태생의 이 시인에게 흔히 따라붙는 별칭은 ‘사물의 시인’. 1942년 그가 펴낸 『사물의 편』이라는 시집은 이후 프랑스문학의 한 장을 장식하면서 그의 독특한 언어관과 세계관을 대변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사물의 편’이라? 말 그대로 인간의 편이 아니라 사물의 편에 서서 글을 쓰려는 그의 입장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제목. 그러나 사물의 편에 서려는 그 입장조차 결국엔 인간의 입장이기에 그는 한발 물러선 입장에서 다시 얘기한다. ‘사물의 편은 곧 말에 대한 참작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시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말(언어)을 거치지 않고 사물을 얘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 흔한 침묵조차도 말을 동반자로 삼고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살아난다. 때문에 사물의 편이든 인간의 편이든 중요한 것은 어느 편에 서느냐가 아니라 어떤 말을 하고 있느냐이며, 그 말이 얼마만큼 말에 대한 고민을 빚지고 나왔는가를 따지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퐁주가 한 말은 이렇게 뒤집어볼 수도 있다. ‘말에 대한 참작(고민)이 곧 사물의 편이다.’
오랜만에 골치 아픈 생각을 하면서 다시 펼쳐본 시집은 2004년에 번역되어 나온 『테이블』. 시집 전체가 테이블에 바쳐지고 테이블을 얘기하고 테이블로 시를 쓰고 있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테이블에서 시작하여 테이블로 돌아오는 자신의 생각을 거의 일기처럼 쓰고 고치고 다듬기를 반복한 역작. 테이블에 대한, 아니 말에 대한 그의 고집스런 면면이 고스란히 담긴 이 시집에서 범상한 독자들이 매력을 가질 만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 와중에 힘겹게 한 대목을 끄집어내 본다.
대패질이 잘되어 매끈하고 두께가 최소 이 센티미터 되는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나무판을 붙여 만든 왁스나 니스 칠을 한 수평적인 테이블. 펜으로 보면 그것은 땅이다.
펜의 입장에서 보면 땅으로 보일 수도 있는 테이블. 그리고 시집에서 가장 무난하게 옮길 만한 대목. 그만큼 난해하다는 뒷말이 자주 따라붙는 시인. 프랑시스 퐁주의 시는 그러나 프랑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만큼 아이들에게 친근한 시이기도 하다(옮긴이에 따르면 프랑스 초등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바로 퐁주란다).
일견 난해해 보이는 퐁주의 시가 초등학생들에게 무리 없이 다가설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난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처럼 사물을 처음 대하듯이 보고 느끼고 기록하는 것, 몇 년에 걸쳐서라도 새로 고쳐서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퐁주의 시였고 또 시를 쓰는 태도였다. 마치 아이들이 매일같이 생각을 고쳐가면서 성장하듯이. 성장한 뒤에도 그 생각이 굳어지지 않고 계속 눈과 귀를 열어놓기를 바라는 것. 퐁주가 생각하는 시는 결국 끊임없이 변해가는 아이들의 시선이었다. 시라고 하면 낭만적인 노래가사나 연애편지, 혹은 생활수기와 다름없는 글을 먼저 떠올리는 나라에서 국정교과서에 들어가는 시가 늘 왜 이 모양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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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언
1992년 공대에 들어갔지만, 공학도가 될 수 없었던 아웃사이더는 결국 시인이 되었다. 1998년 <시와사상>을 통해서다.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을 냈으며 두 권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숨쉬는 무덤』(2003)과 『거인』(2005). 나머지 한 권(『소설을 쓰자』)은 작년에 나와서 그럭저럭 읽히고 있다. 제목처럼 소설을 쓸 각오는 아직 못하고 있다. 다만, 이다음 시집을 채울 시의 골격을 암중모색 중이다. 발표는 많이 하고 있지만, 상상의 틀을 세우지 못한 시는 아무리 발표해도 허기진 얼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민이다. 시의 골격이자 상상의 틀을 다시 세우는 일에 대해, 한편으로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 가는 얼굴에 대해 또 무엇을 쓸까, 세우면서 허물어져 가는 것의 극적인 상황이 한 편 한 편 시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쓴다. 그 고민과 더듬거림과 불확실한 어떤 고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