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
김언
1
자신의 이름에서 만족을 빼야겠지만
그러면 미안해지거나 우스워지겠지
게시판에 없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일원으로 살 건지 관찰자로 살 건지
고민하라고 말랑말랑한 혀를 두고 갔다
코가 몹시 피곤하다
나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2
그 새벽을 거니는 사람은 게이가 아니면
유령이 되어야겠지만
경음악과 춤밖에 없는 노래를 부르며
단어는 조금 더 외로워졌다
문장은 조금 더 상냥해졌다
불평이 없으니까
차례차례 늙어가는 햇빛을 요리하는 기분을 먹었다
저기 문이 떠내려 온다
3
저기 지붕이 떠내려 온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빗방울들의 소설
나는 얌전히 어린아이를 추억하는 도시가 되어가는
자살자의 새로 발간된 철학을 오해한다
“망각해서는 안 된다 방황해야 한다”
미로를 없애면서 새로운 혼잡을 만드는
거리, 공원, 백화점, 호텔, 사무용 빌딩, 아파트와 상가
그리고 훨씬 많은 공장과 책을 읽어야 한다
4
행복한 지식이 별로 없다
배회하는 바위들의 제임스 조이스:
한 사람이 죽고 아파트 경비가 그 사실을 발견한다
그의 부친이 고향에서 달려오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다
다음날
아버지는 아직도 오고 있다
밤늦게까지
지하철과 버스가 시내를 돌아다닌다
5
둘이 만나는 순간은 없다
싫어하는 악기는 색소폰이지만
좋아하는 음악은 재즈에 가까운 것처럼
감정은 바다를 건너간다
사라진 엉덩이에 힘을 주고
누군가 벗어놓은 구두의 방향을 예측하고 고민하고
집에 돌아와서 액자를 떼어내고 말하는
이 자리에는
6
벽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궁하고 딱하고 차가운 파스칼의 어린 시절:
7
a는 크고 b는 작다
c는 작고 d는 크다
어느 것이 가장 큰가
b와 c가 경합 중이다
a와 d가 경합 중이다
<문학동네> 2009년 여름호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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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언
1992년 공대에 들어갔지만, 공학도가 될 수 없었던 아웃사이더는 결국 시인이 되었다. 1998년 <시와사상>을 통해서다. 지금까지 세 권의 시집을 냈으며 두 권은 시중에서 구하기가 매우 힘들다. 『숨쉬는 무덤』(2003)과 『거인』(2005). 나머지 한 권(『소설을 쓰자』)은 작년에 나와서 그럭저럭 읽히고 있다. 제목처럼 소설을 쓸 각오는 아직 못하고 있다. 다만, 이다음 시집을 채울 시의 골격을 암중모색 중이다. 발표는 많이 하고 있지만, 상상의 틀을 세우지 못한 시는 아무리 발표해도 허기진 얼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민이다. 시의 골격이자 상상의 틀을 다시 세우는 일에 대해, 한편으로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 가는 얼굴에 대해 또 무엇을 쓸까, 세우면서 허물어져 가는 것의 극적인 상황이 한 편 한 편 시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계속 쓴다. 그 고민과 더듬거림과 불확실한 어떤 고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