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산적 저격수의 눈
문혜진
아직도 나는 하고 싶어. 결석과 암석의 돌팔매질, 고통 속에 헤벌어진 방만한 눈빛으로 당신들의 흘러넘치는 속물과 겉물의 아밀라아제, 유리 앵무 망막 너머에 맺힌 저것, 누구를 향한 집중사격인지 저주와 주술은 비극을 뛰어넘기 위한 과격한 몸짓인지 몰라. 저것 봐. 눈, 저 지독하게 풀린 거대한 동공. 북극, 툰드라, 시베리아에서부터 너만을 겨냥하고 몰아온 눈과 눈, 바람과 바람. 그 긴 항로가 조준을 마치고 집중 사격하는 이곳. 눈과 바람의 무시간차 공격술에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그들의 사격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어. 이 거세고 대담한 눈발 속에서 아직도 나는 하고 싶어.
반백의 올빼미처럼 이마를 드러낸 인왕산 바위가 습기 속에서 불타다 만 고목의 수액 같은 표정을 감추고 하얗게 변신술을 부리고 있어. 인왕산길과 북한산길이 닫히고 카페 ‘에스프레소’를 지나 무릎까지 눈이 푹푹 쌓인 자하문 언덕 도로를 처음으로 걷고 또 걸었지. 팔레스타인 연인의 장벽 같은 옛 성곽을 따라 육중한 바위산을 뒤덮은 눈발은 점점 거세져 내가 구름의 시야에서 눈을 이해하는 날도 있구나. 흰올빼미의 뒷덜미 같이 산은 본능적인 불안과 위엄을 감추고 마른 나무에 젖을 먹이는 수유부의 맨가슴 같은 폭설이, 침엽수와 침엽수 바위와 바위 사이를 차갑고 부드럽게 채워주고 있었지.
천적들, 사슴의 첫 뿔이 나뭇가지로 보일 때까지 부드러운 벨벳으로 싸여있던 너의 사정권 안에서 일 년에 한 번, 봄이면 균형 잡힌 뿔로 뿔갈이를 하고 뼈와 창처럼 날카롭게 갈고 또 갈아 나무와 나무 가지와 가지에 켜켜이 눈이 쌓이면 시간의 협곡처럼 휜 오직 너만을 노리는 우거진 뿔이 있지. 아직도 나는 하고 싶어. 우연과 낙천으로 버무려진 간접화법 같은 눈빛으로 유골더미에서 뼈를 맞추다 돌아온 남자의 셔츠를 빨고 싶어. 그 먼지의 켜를 뼛가루와 함께 가장 높은 산 위에서 털어내는 상상.
눈이 그치고 모든 장엄들이 다시 시시해져 폭설에 민가로 내려와 먹잇감을 노리는 맹금류의 사냥이거나 고치다 만 지붕 위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이 지난밤 폭설과 함께 맥없이 녹아내리고 있어. 전신주 위 고개를 묻은 채 대낮부터 미동조차 없던 그 새는, 사냥할 생각은 있는 것인지 무엇을 노리고 저 생뚱한 장소에 오래오래 같은 자세로 버티고 있는지 알 길이 없네. 암산적 저격수의 눈, 무엇을 향한 조준인지, 절박한지, 맹목인지 그 눈의 깊이를 알 길이 없고 내 마음도 알 길이 없다.
그래도 아직 나는 하고 싶어! (*)
----------------------------------
작가 소개
문혜진
“내가 사는 동네는 꼭 새둥지 같다. 내가 태어나 자란 동네도 매둥지 같아서 사람에게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매의 습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비밀 요새 같은 이 산자락에서 내가 발견한 야산의 고목 아래 물웅덩이에 내린 벚꽃이라든가 옛성곽에 걸린 달빛을 따라 걷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사는 동네에는 까치도 많고 까마귀도 많아서 까치와 까마귀가 같이 운다. 까치와 까마귀가 같이 우는 그런 세상에 산다는 자각보다는 내 방 창가에 가까이 와서 울다 가는 새들의 디테일에 감각을 열고 엿보는 일이 얼마나 저릿한지. 빗 속에 들리는 단비비소리, 눈 내리는 소리, 눈 쌓이는 약한 지붕들이 내는 소리. 다큐적 진경 속을 아이와 거닐면서 인왕제색도가 되었다가 몽유도원도가 되었다가 뜨거운 핫초코가 되었다가… 며칠 전에는 집앞 전신주에 멧비둘기 몇 마리가 미친듯이 울어대어 창문을 열어 보았는데, 폭설속에 올빼미인지 부엉이인지가 목석처럼 앉아있는 게 아닌가. 덩치가 작은 것으로 보아 올빼미 같기도 하고 새끼 부엉이 같기도 한데, 그 보다도 왜 그 시간에 산에서 내려와 남의 둥지를 지옥으로 만들었는지, 못내 궁금하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해 시집 『질 나쁜 연애』, 『검은 표범 여인』을 펴냈다. 2007년 제26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