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밤
문혜진
어디 너의 무용담을 한 번 펼쳐보시지 보드카만 축내지 말고 취하면 고, 고, 고르바초프로 시작되는 그 말더듬이가 거슬리지만 우데게 마을 이야기 좀 해봐 진짜 호랑이를 보긴 한 거야? 호랑이 사냥꾼이자 제사장인 와샤 그의 러시아 백마들과 어울려 질펀하게 퍼마신 이야기 말고 진짜 시베리아 이야기를 들려줘
시베리아 아- 긴 폭설을 뚫고 지나가는 육중한 열차 타이가 숲에서 필요한 건 한 개비의 성냥과 총알 한 방, 나에게 필요한 건 창백한 러시아 영계의 불타는 계곡주 지루함에 불 지르는 네버 엔딩 스토리 놀고 있네 더 취하기 전에 썰 좀 풀어봐!
호랑이의 배설물과 흔적이 있는 길목에 땅굴을 파고 나무 위에 위장막을 짓지 100킬로미터 펼쳐진 광활한 그의 영역에서 1년을 기다렸어 영하 20도의 혹한, 이빨은 썩어 들어가고 관절은 옹관 속 미라가 다 됐지 길목 여기저기에 무인 카메라를 장착하고 호랑이를 기다리는 거야 냄새를 피우지 않기 위해 페트병에 오줌을 싸고 똥은 비닐에 묶어두었다 교대할 때 버리지 통조림과 곡물 말린 씨앗과 열매로 배를 채우고, 백가지가 넘는 바람소리에 귀를 열어
그렇게 모니터만 주시하기를 수개월, 러시아 예술사와 만화책이 공무원시험 문제풀이집이 될 즈음 온 몸에 감각을 세우고 바람소리에 귀가 발기된 새벽, 깜빡 졸다가 오줌이 마려워 깼는데 모니터에 뭐가 휙 지나 가는거야 너구리겠지 하는 순간 헉! 암흑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안광眼光 원격감지카메라 렌즈를 노려보며 커다랗고 느릿한 무언가가 슬금슬금 다가왔지 왕대王大 였어
왕대가? 빡 돌아버린거야 예민한 코가 이미 모든 냄새를 맡은 후였어 놈은 위장막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주저 없이 앞발로 카메라 렌즈를 툭 내리쳤어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버렸지 쫌팽이! 렌즈가 박살나고 그 다음은 내 차례잖아 이상한 쾌감이 밀려왔어 왕대와 마주한 그 절대의 공포와 위엄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지 호랑이는 카메라를 다 부수고 위장막 쪽으로 다가와 내 손등에 수염을 스윽 스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
동대문운동장 세르게이라는 고려인의 술집, 너는 홀린 눈빛으로 보드카에 양고기꼬치를 씹으며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 채 자주 중얼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지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삶이 네가 진짜 원하던 인생이었다고 매혹의 대가는 그토록 쓰고 달콤하며 그 발자국 끝에는 정말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가 있었다고, 푸까초바인지 조까부까인지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오랜 유배생활에 폭삭 삭아 내린 이 사이로 담배를 끼워 물고 도넛을 만드는 너는 묘기의 달인.
『검은 표범 여인』에서 전재 (문혜진,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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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문혜진
“내가 사는 동네는 꼭 새둥지 같다. 내가 태어나 자란 동네도 매둥지 같아서 사람에게 절대로 길들여지지 않는 매의 습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비밀 요새 같은 이 산자락에서 내가 발견한 야산의 고목 아래 물웅덩이에 내린 벚꽃이라든가 옛성곽에 걸린 달빛을 따라 걷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사는 동네에는 까치도 많고 까마귀도 많아서 까치와 까마귀가 같이 운다. 까치와 까마귀가 같이 우는 그런 세상에 산다는 자각보다는 내 방 창가에 가까이 와서 울다 가는 새들의 디테일에 감각을 열고 엿보는 일이 얼마나 저릿한지. 빗 속에 들리는 단비비소리, 눈 내리는 소리, 눈 쌓이는 약한 지붕들이 내는 소리. 다큐적 진경 속을 아이와 거닐면서 인왕제색도가 되었다가 몽유도원도가 되었다가 뜨거운 핫초코가 되었다가… 며칠 전에는 집앞 전신주에 멧비둘기 몇 마리가 미친듯이 울어대어 창문을 열어 보았는데, 폭설속에 올빼미인지 부엉이인지가 목석처럼 앉아있는 게 아닌가. 덩치가 작은 것으로 보아 올빼미 같기도 하고 새끼 부엉이 같기도 한데,그 보다도 왜 그 시간에 산에서 내려와 남의 둥지를 지옥으로 만들었는지, 못내 궁금하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해 시집 『질 나쁜 연애』, 『검은 표범 여인』을 펴냈다. 2007년 제26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