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패망은 스스로 초래하는 것
1127년 금(金)나라 군대는 송(宋)나라의 수도 개봉(開封)을 함락하고, 상황(上皇)인 휘종과 황제 흠종을 잡아간다. 이른바 ‘정강(靖康)의 변(變)’이다. 흠종의 동생인 강왕(康王, 뒤에 高宗이 됨)은 항주(杭州)로 달아나 그곳을 서울로 정하고 나라를 이어간다. 이것이 남송이다. 망한 송나라는 북송이라 부른다.
황제 둘이 산 채로 끌려가 만주 땅 오국성(五國城)에서 죽은 사건은 중국 역사에 없던 기변(奇變)이었다. 왜 북송은 이렇게 허약하게 망했던 것인가. 물론 기본적으로야 강력한 요(遼)나라와 금나라 같은 강력한 이민족 국가가 북방에 존재한 데 그 원인이 있겠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른 국가의 침공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 이유란 구체적으로 말해 어떠한가? 「송나라는 스스로 망한 것(宋亡自取)」(22권, 경사문)에서 성호는 말한다.
송나라 시절에는 오랑캐만 창궐했던 것이 아니다. 송나라 내부에 멸망을 초래할 원인이 있었다. 국가의 안위는 민생의 고락에 달려 있고, 민생의 고락은 재정의 빈부에 달려 있으며, 재정의 빈부는 정치의 사치와 검소에 달려 있다. 나라의 정치가 사치스러운데도 백성이 부유해진 경우는 없었다. 백성이 곤궁하면 외적이 엿보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지배계급의 사치는 백성이 생산한 물자를 착취함으로써 가능하다. 지배계급의 사치는 곧 백성의 궁핍을 의미한다. 굶주려 허약한 백성으로 가득 찬 나라는 이웃에 있는 강대국의 먹잇감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궁핍에 시달리는 백성은 국가의 안위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안위에 관심을 보일 여력이 없다. 성호는 멸망의 원인이 된 송의 사치를 이렇게 지적한다.
변도(?都, 북송의 수도) 시절에는 교례(郊禮, 천자가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나면 참여한 사람들은 수만 금의 상을 받았다. 인종(仁宗)은 황녀가 태어나자 비단 8천 필을 가져다 썼다. 궁중에서 내린 은사물(恩賜物)은 여기에 들지도 않았다. 재인(才人, 후궁의 한 부류) 한 사람의 월봉이 중간 정도 사는 1백 집안의 세금에 해당하였다. 이런 것들이 그 사치의 한 증거라고 하겠다. 『서경(書經)』에, “부디 검소한 덕을 더욱 닦아 장구히 이어갈 계획을 세우소서” 하였으니, 송나라의 경우는 정말 장구한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닌 것이다.(「송나라는 스스로 망한 것」)
성호의 지적은 모두 내력이 있다. 교례를 지내면 수만 금의 상을 받았다는 말은, 사마광(司馬光)이 신종에게 올린 글에서 나오는 말이다(사마광의 글에는 ‘數萬’이 아니라, ‘數百萬’으로 되어 있다). 인종의 황녀가 태어나자 비단 8천 필을 가져가 썼다는 말은 구양수(歐陽修)가 인종에게 올린 글에 나온다. 마지막 재인 운운하는 말 역시 범사도(范師道)가 인종에게 올린 글이 그 출처다. 모두 사치를 말리는 말이다.
인종?신종 때의 사치는 당연히 정강 때까지 이어진다. ‘정강’은 흠종의 연호다. 한데 문제는 흠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휘종에 있었다. 알다시피 휘종은 금나라의 침공이란 문제를 회피하려고 아들 흠종에게 제위를 떠맡긴다. 휘종은 원체화(院體畵)를 대표하는 대단한 서화가이자 예술가였지만, 실제 황제로서의 그는 극도의 음락(淫樂)과 사치에 젖어 산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소설 『수호지』는 뇌물로 얼룩진 선화(宣和) 연간의 송나라 관료사회를 묘사하고 있는바, 선화는 휘종 말기의 연호다. 『수호지』는 공연히 휘종 시기를 타락의 시대로 다룬 것이 아니다. 이처럼 부패한 지배층이 통치하는 나라는 외적을 막을 능력이 당연히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인간은 역사를 쓰지만, 역사를 거울로 삼고자 하지만,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 명나라는 송나라와 같은 방식으로 멸망의 역사를 반복한다. 성호는 「숭정제(崇禎帝)」(22권, 경사문)에서 명나라의 멸망에 대해 동일한 주장을 펼친다. 그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죽기 직전 “내가 망국지주(亡國之主)가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바로 망국지신(亡國之臣)이다”라고 내뱉은 말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왜인가? 즉 숭정제는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를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호가 보기에 명나라의 멸망 원인 또한 지배층의 잔혹한 통치와 백성에 대한 무한한 착취, 또 그것에 기초한 지배계급의 과도한 사치에 있었다.
명나라 중엽 이후 환관이 권력을 잡자 가렴주구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비유컨대 수령이 멍청하고 못난 인물이면 서리들이 제멋대로 백성을 학대하는 것과 같았으므로 황제는 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있고, 뭇 간신들은 황제의 위세를 빌려 혹독한 법을 마음대로 휘둘러대었으니, 어떻게 나라를 잃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숭정제」)
명나라는 무종(武宗, 1506~1521) 이후 활기를 잃어버린다. 황제는 정사에 관심이 없었고 대신 환관이 권력을 쥐었다. 환관은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 때 설치한 비밀경찰 기관인 동창(東廠)을 장악하여 사대부들을 감시하고 국가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를 통해 환관이 축재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성호는 환관이 모은 재산을 낱낱이 열거하고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을 만한 규모다. 차라리 성호의 결론을 들어보자. “천하의 재보(財寶)는 백성에게도 있지 않고, 나라에도 있지 않고, 깡그리 환관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숭정제」) 성호는 한 사람만 축재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발각되지 않았다뿐이지 국가권력을 사유화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축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성호는 이런 이유로 해서 “사해(四海)가 물이 끓어오르듯 사방에서 다투어 봉기한 것인데도 숭정제는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원한 국가는 없다. 기세 좋게 세워진 국가도 언젠가는 망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 국가의 권력을 요리하면서 사익을 누리던 집단들은 국가가 왜 망했는지 성찰하는 법이 없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권세를 누렸던 양반들이 망국의 이유를 진지하게 성찰했다는 말을 나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망할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다. 조선은 왜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비극을 맞이했던가.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시전 상인들이 봄 가을이면 너도 나도 도성 안팎 산에 술과 풍악을 갖추고 모여 해가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경인년(1590)ㆍ신묘년(1591) 어림에 “얼마 안 있어 세상이 바뀔 것이니, 살아생전 취하고 배불리 먹는 것이 낫다”는 말이 서울에 나돌았고, 서로 질세라 놀고 즐기며 가산을 거덜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식자들은 좋은 징조가 아니라고 하였다.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1392년 건국 이후 조선은 2세기 동안 유래 없이 장구한 평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안락에 빠진 지배층은 스스로 분열한다. 이른바 당쟁이다. 당쟁은 권력 투쟁이다. 무슨 나라의 방향을 바꿀 만한, 백성의 삶을 윤택하자 하자는, 정책의 차이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패거리를 만들어 상대방을 비난한다. 말의 꼬투리를 잡아 고의로 오해하고, 옥사(獄事)를 벌여 피를 보고 귀양을 보내고 사람을 죽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4년 전에 있었던 이른바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있었다. 그다지 역모라고 할 것도 없는 사건을 부풀리고 또 부풀려, 죽이고 또 죽이지 않았던가(동인 1천여 명이 화를 입었다). 속내야 정치권력을 제 손아귀에 넣겠다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온갖 거룩한 명분을 댄다. 왕은 왕대로 자기 권력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며 당쟁을 이용한다.
성호는 당쟁이야말로 전쟁을 불러일으킨 결정적인 이유라고 말한다.
풍신수길(豊臣秀吉)은 필부(匹夫)로 심부름꾼을 하다가 발신하여, 순식간에 66주(州)를 차지하고 만사를 제 마음 먹은 대로 처리하였다. 그때 우리나라는 문신과 무신이 모두 노닥이며 세월만 보내었고, 당쟁의 화(禍)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 풍신수길은 ‘명나라를 집어 삼키겠다’고 큰 소리를 쳐 명나라를 묶어 조선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 뒤, 우리나라가 당쟁으로 싸우는 것을 기회로 삼았다. 제 뜻대로 두 나라를 합쳐 하나로 만든다면, 처음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나중에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는데,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수길의 심복으로 종종하여 일을 이룬 것이었다.〔「풍신수길이 상국을 범하다(秀吉犯上國)」(23권, 경사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지배층의 분열, 곧 당쟁을 기화로 하여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성호는 이렇게 전쟁은 ‘풍신수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임금과 신하가 사이가 벌어지지 않고, 정령(政令)이 치밀하였더라면, 바다 바깥의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들이 감히 침략할 마음을 먹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자 선조는 당쟁을 나무랐다. 선조가 지었다는 시다.
나랏일 경황이 없는 오늘
뉘라서 이ㆍ곽의 충성을 바치랴?
서울을 떠나는 것은 앞으로 큰 계책을 생각해서고
땅을 되찾는 것은 여러분에게 의지할 뿐이다.
관산(關山)의 달을 보면 통곡을 하게 되고
압록강 바람에도 마음이 서글퍼지네.
조정 신하들은 오늘 이후에도
또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들먹일 것인가.
國事蒼黃日 誰能李郭忠 去?存大計 恢復仗諸公
痛哭關山月 傷心鴨水風 朝臣今日後 寧復更西東
〔* 이?곽이란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를 말한다.〕
선조의 이 시를 읽을 때마다 한심하다. 당쟁이 한심한 것은 물론이고, 선조 역시 한심하다는 말이다. 그가 과연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었을까?
선조조의 당쟁을 보면, 내부의 분열이 전쟁을 초래했다는 성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더욱 한심한 것은, 당쟁으로 인해 전쟁을 초래한 것을 알고도 당쟁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호의 말이다. “한스러운 것은 처참한 패배 뒤에 처음으로 평양에서 한 번 이기고부터 당쟁이 다시 치열해진 것이다.” 서울을 버리고 달아날 때는 당쟁을 계속할 겨를이 없었지만, 한 번 승리를 거두자 다시 집안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역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