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회(마지막회)
여자의 목소리가 대범하게 달라졌다. 그리고 빨라졌다.
“겉보기엔 요조숙녀처럼 보이는 여자였어. 남편이 약간 관심을 보이자 기분이 나쁘진 않았겠지? 남편은 최고의 엘리트이고 수재잖아. 멋있는 신사에다 잘생긴 외모에다. 여자도 남편에게 끌리긴 했겠지. 그렇다고 물론 이성적인 관계까지 원한 건 아니었겠지만. 이 추잡한 일은 남편이 먼저 시작한 것이었으니까. 남편이 잔인하게 성추행을 한 건 여자에게 큰 상처였어. 하지만 여자는 비정규직이었어. 여자는 정규직으로 살아남아야겠다 생각했지. 여자는 남편이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영리한 여자니까. 여자는 선택을 해야 했어.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거 같았기 때문이지.”
“…”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어. 적절한 타협의 지점을 찾기 위해. 그런데 어쩐다? 여자가 남자친구와 모텔에 들어가는 걸 남편이 목격하게 된 거지. 갑작스런 상황이 벌어진 셈이야. 남편은 그 일로 몹시 자존심이 상해버렸어. 여자는 자기 상사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지만 이미 서로의 감정이 엉켜버린 뒤였지. 남편이 온갖 방법으로 여자를 압박해오자 여자는 결단을 내려야했지. 남편의 성추행, 성폭행 혐의를 고발해 계약직 목숨을 유지해야겠다는 마지막 선택 말야…”
이두나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턱이 덜덜 떨려왔다.
“완강한 저항이 철저한 복종으로 변하지. 다음에 새로운 생존을 모색하다 복종은 다시 반항으로 소생하기도 해. 이 소용돌이와 평화의 교차가 이 세상의 삶을 구성하는 거야. 이런 걸 화요일의 키스라고 하지. 독일의 어느 시인이 말한 거야. 달콤하면서 끔찍한 키스, 권력에 대해 저항하다 복종하고 다시 반항하고… 우리 모두가 속아 넘어가고 속았다는 걸 알면서 다시 속아 넘어가는 게 삶이지. 뿌리치다가 탐하고 다시 뿌리치는 몸부림 같은 키스, 이런 게 삶이야. 참, 이상하지?”
여자는 악마처럼 웃었다.
“인간들은 뻔해. 애지중지 키우던 집고양이가 정작 죽자 그 집고양이의 가죽을 몇 푼이라도 받고 팔 생각만 한다니까. 넌 그 고양이였던 거야.”
“…”
“훗… 그러나 결국 네가 이겼어. 나도 이겼고. 주상도를 연구소 소장직에서 쫓겨나게 했으니 훗훗훗… 너무 재밌지 않아? 이제 우리는 동지지?”
이두나는 고해성사실 커튼 자락을 한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 쭉 흘렀다.
“…”
성당 사제관 안에 씁쓸한 아몬드 향 같은 냄새가 피워 올랐다. 촛대에 초가 타고 있다.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모든 욕망이나 분노가 사라질 듯도 했고. 분노와 신음이 다시 솟아나는 듯도 했다. 나무 괘종시계가 몇 번 소리를 내며 울었다. 열어둔 창틈에서 바람이 휙 하고 들어왔다. 광목 커튼이 소리를 내며 펄럭였다. 유리창이 울음을 삼키듯 덜컹거렸다. 눈발이 발끝을 세우고 창가로 들어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역할극은 끝이 난 듯했다. 여자가 사제관 문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났다. 이두나는 한참을 혼자 앉아 있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네가 남편에게 이 편지를 주고 나서 남편은 네가 더 이상 매력이 없어졌다고 하더라. 너도 다른 여자애들과 똑같다고…” 이두나는 좀 전에 여자가 한 말을 생각했다.
사제관 거실로 나왔다. 거실 테이블 위엔 이두나가 주상도 소장에게 보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소장님, 소장님이 원하시는 거, 하겠습니다. 딱 한번. 딱 한번입니다. _이두나 드림
편지는 짤막했다. 편지는 비정규직 이두나의 필체였다.
테오 신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가 한번 몸부림을 쳤는지 베개를 밀어낸 채 머리를 바닥에 들이밀고 있었다. 편지는 벌거벗은 성기처럼 누워 있었다. 이두나는 편지지를 단번에 구겨버렸다. 이두나의 얼굴도 종이처럼 구겨졌다. 그리고 구겨버린 종이를 호주머니에 재빨리 넣어버렸다.
이두나는 천천히 사제관 미닫이 유리창 쪽으로 다가갔다. 광목 커튼을 쥔 이두나의 손이 떨렸다. 커튼을 살며시 열어보았다.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머리에 짙은 갈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통통한 살집에 베이지 바바리를 입고 있었다. 입었다기보다 천을 둘렀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여자가 잰 걸음으로 성당 마당을 지났다. 여자는 다리를 절지 않았다. 여자는 똑바른 걸음걸이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벌써 눈이 쌓여 있었다. 발자국이 뚜벅뚜벅 찍혔다. 여자는 몇 걸음을 가더니 성당 입구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이두나는 잠시 호흡을 멈추고 커튼자락을 움켜쥐었다.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여자는 사제관 이층 유리창, 이두나를 쳐다봤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이두나는 쇼핑 카트로 두 번이나 옆구리를 찔린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황급하게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여자는 뭔지 모를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뒤를 돌아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몸이 정신없이 떨렸다. 다리가 미끄러지듯 비틀거렸다. 이두나는 가까스로 커튼을 잡았다.
번개가 무슨 계시처럼 몇 번을 짖었다.
창밖에 눈이 그쳤는지 밝은 햇빛이 쏟아지고 있다. 마당에 흰 눈이 한 뼘은 쌓여 있다. 돌아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해 보였다. 다만 세상의 모든 분노와 욕망이 하얀 눈 아래 잠잠했다. 어떤 분노와 욕망을 다 끄집어내 널어 말려도 될 듯한 쾌청한 하늘이었다.
에필로그
신부님, 저 균인데요. 정말 이두나 선배님 때문에 죽겠다구요. 선임연구원이면 답니까? 맨날 전화하고 문자하고… 만나자 해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까지는 참겠습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몰래 내 엉덩이를 만지질 않나 뺨을 만지질 않나… 아무리 직장상사라지만 이래도 됩니까? 언제는 자기 헤어스타일이 바뀐 거 알아채지 못했다고 일주일 동안 야근을 시켰단 말예요. 이건 여자들의 자기연민에 불과하다고요. 옷차림, 향수, 음식, 영화 보는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의견을 묻질 않나. 남자란 그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둥 하면서 비웃고… 곶감 뜯어먹듯 내 모든 시간에 끼어들어 뜯어먹으려 든다니까요. 예쁘다, 멋있다, 잘 어울린다, 맨날 말해야 하니 남자를 완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어요. 이건 권력을 이용한 횡포란 말입니다. 직장 상사면 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