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언제나 생은,
죽음 다음에 온다.
그 이후에 나를 찾아온 것은 완벽한 겨울이었다. 흰 눈이 세상을 덮었다. 뻔뻔스럽게도. 많은 죄를 덮고 많은 수치를 숨겨주었다. 눈이 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죄도 팥죽처럼 눈과 함께 흘러가버렸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것의 행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때로 수치심도 치욕도 그렇게 잊고 싶을 때가 있다. 다만 질척질척한 진흙길의 진흙이 신발밑창에서 빨리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다시 햇빛이 나 삶은 보송보송해졌다. 빨랫줄에서 잘 마른 이불처럼.
어릴 때 나는 일기 쓰는 것을 좋아했다.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잘 건조해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고통은 삭고 곪고 숙성되어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다 보면 나도 다시 보송보송해지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일기라도 일기장 위에 벌거벗고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벌거벗고 누워 있으며 누군가 몰래 내게로 다가와 나의 성기를 만지기도 하고 냄새 맡기도 하고 주물럭거리기도 할 것 같았다. 비밀은 알려지기 위해 존재할 수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원하는 비밀도 있는 법.
예를 들면 어릴 때 출장 갔다 가끔 우리 집에 들르곤 하던 삼촌이 밤에 내 방으로 몰래 들어와 아직 멍울도 채 생기지 않는 내 젖꼭지나 성기를 만져댄 일 말이다. 대학 때 함께 자취하던 친구가 남자친구와 함께 있다 나간 후 변기 구멍에 난데없이 여자 속옷이 둥둥 떠 있다든가 하는 난데없는 일들 말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지만 일일이 내 삶의 기록 속에 모두 기억으로 남겨둘 필요까지 없었다.
그건 어쩌면 기억에 대한 예의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망각에게로 넘겨주는 일 말이다.
“조니 워커 블루, 야, 이두나 자매, 내 식성 아직 안 잊었네…” 테오 신부가 히히거리며 말했다.
“당연하죠. 신부님, 어릴 때부터 신부님의 식성은 조니 워커 블루였잖아요. 중학교 때부터… 참, 고급스럽기도 하지.” 내가 블루의 따개를 따며 말했다.
“근데 웬일이냐?” 테오는 안경 너머로 눈을 껌벅거렸다.
“삶을 통째로 도둑맞았다 다시 찾은 느낌? 뭐, 그 정도로 해두죠. 나도 나 자신을 위해 건배하고 싶어서요…” 테오 신부와 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고 나는 작은 위스키 잔을 높이 들었다.
“한동안 나와 함께 살았던 불행과 치욕과 죄와 모욕감을 위해. 그들을 위해!”
“아주 살판났군.” 테오는 씩 웃고는 술잔을 들었다.
“그럼요.” 나는 희죽 웃었다.
술을 넘겼다. 부드럽고 뜨거운 것이 몸의 비밀스러운 수맥을 따라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잔을 따랐다. 테오와 나는 따르고 마시고 따르고 마셨다. 사제관 유리창 밖에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다 씻어줄 것 같이 순결해 보였다.
“그 잔인한 신사가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게 다 해결된 거야? 그가 있어서 넌 너를 좀 더 알게 되기도 했어.” 테오의 혀가 약간 꼬부라졌다. 그는 말을 이었다.
“치욕이나 모욕이 없었다면 너는 너를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불행은 자신을 발견하게 하지.”
“하긴 그랬어요. 대단한 엘리트에다 수재에다 미남에다, 그런 남자의 가슴에 한번 안기고 싶기도 했어요. 어쩌면 그의 대단한 권력과 실력을 흠모하고 있었는지 몰라.”
“탁월하고 유능한 사람을 연모했잖아?”
“물론 멋지고 대단한 남자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자식은 비열한 폭군에 불과했어. 이중인격자. 거기서 내 불행이 시작된 거지.”
“그러니까 불행이 네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준다는 거야. 네 자신에게조차 낯선 너의 존재를. 그 교활한 작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을 거야. 치욕감도 수치심도 알지 못했겠지. 정글에서 사자를 만나기 전에 우리가 용감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가 없듯이 말야.”
“술을 다 마셔보기 전에 술 주량을 모르듯이?” 나는 킥킥댔다.
“야, 야. 그런 게 아니고….” 테오도 함께 킥킥댔다. 다시 술을 따랐다.
“내 말은, 상처를 받았으니까 이젠 네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야. 인간은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구하거든.”
“예수님이 우릴 구하시는 게 아니구요?”
“물론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시긴 하지….” 테오는 말이 늘어지더니 블루를 한 잔 넘겼다. 술이 꽤 취해보였다.
“우리 모두 같은 오류들을 범해.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유혹에 넘어가기도 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이야. 문제는 스스로 상처 내고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것을 치유하는 일만이 남았어….” 테오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선배, 아니, 신부님, 꼭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테오의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그때 부산에서 작은할아버지가 올라왔을 때 할아버지가 뭐라 그러시던가요? 둘이 기도실에 들어가 둘이 속닥거렸잖아. 죽기 전에 무슨 큰 죄라도 고백하시던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부산에서 기차 타고 올라와서 그렇게까지 부산을 떨 수가 없잖아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테오 신부님께만 고백하고 싶었던 어떤 비밀이 있었던 거 같아서….”
“으응…” 테오의 혀는 거의 꼬부라져 있었다.
“작은할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무슨 특별한 고해성사라도?”
“뭐, 누구나 어둡고 창피한 비밀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그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함 같은 것이기도 해… 그렇다고 작은할아버지가 뭐라 특별히 말씀하신 건 없어.”
“그럼요…?”
“그냥… 음,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이 지상의 생과 작별을 하기 위해 날 찾아온 거였어.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어. 되돌아보면 아무 일도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것 같군… 뭐 그런 말…?” 그렇게 말하고 테오는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으응? 신부님,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나는 테오 신부를 흔들었다.
“그래도 작은 할아버지가 뭐라 비밀을 말한 게 있을 게 아니에요?”
술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테오는 훌러덩 누워 푸우, 푸우 하고 잠이 들어 있었다. 배가 처진 스모선수 같았다.
나도 테오에게만 고백하고 싶은 비밀이 있었는데 말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사제관 현관에 누군가 테오 신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당 사제관 신부에게 밥해주는 노파 목소리는 아니었다. 훨씬 젊고 높은 톤의 여자 목소리였다.
“신부님, 계세요?”
반투명 유리창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고해성사를 하러 왔습니다…”
심장이 꽈당 하고 넘어졌다. 나는 나무 마룻바닥에 누워 있는 테오를 깨우기 시작했다.
“신부님, 신부님…”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테오는 여전히 푸우, 푸우였다. 집채만 한 풍채로 뻗어 있다.
네,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젯밤 서울 근교 조그만 성당 신부가 사제관 골방에서 술을 죽도록 마시고 뻗어 고해성사를 하러 온 신도가 깜짝 놀라 신고를 하였습니다. 자, 지금 제 옆에 그 목격자가 있는데요? 어제 정말 사제관에서 신부가 술을 마시고 뻗어 있던가요?
이렇게 목격자의 목격담을 세상에 널리 퍼뜨릴 수는 없었다.
테오가 갑자기 한쪽 팔을 들더니 한쪽 다리 정강이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어휴… 어떡한다? 나는 낑낑대며 테오를 바르게 눕히려 했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내 외투를 벗어 베개를 배어주는 선에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나는 나무바닥에 발을 콩콩 찧었다.
역할극 할 때처럼 흉내 내기, 그래 이 방법밖에 없을 듯했다.
성당 사제관 밥해주는 노파는 분명 신부가 사제관에 있다고 말했을 것이고 테오의 신발도 사제관 신발장에 다소곳이 놓여 있을 것이다. 테오가 갑자기 공중부양하지 않는 이상 사제관에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흠흠.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고해성사실로 들어갔다. 테오 목소리를 잘 흉내낼 수 있을까.
대학 때 동아리에서 테오와 역할극을 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땐 동아리 행사 중의 하나로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위한 일종의 연출이었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사람들은 내가 테오 흉내를 낼 때마다 까르르 뒤로 발라당 넘어가도록 웃어재꼈다. 잘해서 그런 것인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알 수는 없었다.
참, 살다 살다 별걸 다해 보는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테오에게 술을 먹인 것은 나다. 그 술 때문에 테오를 다시 시골 성당으로 쫓겨나게 할 순 없다.
고해성사실에 들어갔다. 나무 테이블은 편안한 잠처럼 고요하고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그 위에 가죽 카바 가장자리가 닳은 성경책이 펼쳐져 있었다. 이사야였다. 조금 있으니 고해성사실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말씀하십시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테오가 신부가 처음 되었을 때 나를 세워두고 연습하던 대사였다. 그때 나는 신부가 주기도문, 축복기도 등을 연습할 뿐만 아니라 고해성사를 위한 대사도 연습한다는 걸 알았다.
“죄를 고백하러 왔습니다. 신부님…” 여자는 침착하고 지적인 목소리를 냈다.
“고하십시오. 흠흠…” 테오 신부, 아니 나는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