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일요일 한낮 형두는 가스레인지에 바지락 칼국수를 끓이고 있었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반죽을 하고 밀대로 밀었다. 칼로 곱게 채를 쓸었다. 코끝에 밀가루를 묻힌 채 형두가 물었다. 바지락이 좋아? 멸치 다시다가 좋아?
한나 언니는 티브이를 보면서 코를 후비고 있었다. 아무거나…라고 말하면서.
나는 주상도의 파일 인쇄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임나영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페이지였다. 방바닥에 종이를 펼쳐놓고 한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미나가 내 방에 들어왔다. 미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갑자기 종이 한 장을 물고는 거실로 달아났다. 응? 뭐야? 나는 미나를 잡기 위해 거실로 달려갔다. 미나는 소파 위로 탁자 아래로, 그리고 텔레비전 뒤로 전기 자전거 뒤로 돌았다. 무슨 심보인지 열심히 파일 인쇄 종이를 물고 도망 다녔다. 뭐야, 너 정말 이러기야? 나는 약이 오른 침팬지처럼 가슴을 쳤다.
미나와 나의 숨바꼭질은 나의 발차기로 막을 내렸다. 이단옆차기였다. 손으로 잡기를 포기한 덕이었다. 미나는 옆구리를 차인 듯 비명을 질러댔다.
“어휴ㅡ, 이놈의 개새끼, 정말 보면 볼수록 밉단 말이야.”
내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뭐야, 너 동물 학대야, 걔가 얼마나 귀한 종인데 우리나라에 몇 마리 없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건 아냐.”
나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렇다고 왜 꼬리를 잡아들고 있어?”
형두가 칼국수 국물 간을 보면서 말했다.
“얘가 내 서류를 다 물어 뜯어놨단 말야… 다음에 이러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줘야 해.” 나는 미나를 들고 베란다로 갔다.
“뭐하는 거야?”
형두와 한나 언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보면 몰라? 공중에 떠 있는 맛이 얼마나 무서운지 맛보게 하려고…”
나는 베란다 창문 밖 허공중에 개를 들어올렸다. 개는 기운이 빠졌는지 축 쳐져 있었다. 깨갱깽 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이젠, 너도 잘 알았겠지? 허공중에서 버둥거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희죽 웃었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일요일 한낮. 이런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요즘 일요일엔 신문배달원도 세탁소 배달원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들도 일요일의 평화를 즐길 권리가 있었다.
“누구세요?” 형두가 앞치마에 손을 훔치며 물었다.
현관 문밖에서 금방 다부지고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입니다. 이두나 씨 댁이죠? 이두나 씨 계십니까?”
순간, 형두와 나, 한나 언니 세 명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에 모였다. 현관 쪽으로. 그리고 다시 셋은 서로들의 시선을 교환했다. 시선이 허공중에 부딪치며 와장창장 유리창 깨지듯 부서졌다.
그때 미나가 초인종 소리에 놀랐는지 버둥거렸다.
미나가 내 손에서 미끄러졌다. 순간이었다.
아, 아… 나는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내 손으로 틀어막았다.
미나가 7층에서 밑으로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형두와 한나 언니는 반쯤 입을 벌린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커다란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다시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죠….” 형사는 한 명이 아닌 것 같았다. 한 명은 현관에 한 명은 범인이 도망갈 경우를 대비해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나는… 나는 유리창 아래 1층 화단을 내려다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미나가 나자빠져있거나 나자빠져 있는 미나 옆에 형사 같은 웬 남자가 서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침착해… 침착해…” 형두가 손을 내저으며 낮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 하던 일들을 하는 사람처럼 하던 일을 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식탁 위에 수저를 하나씩 놓기 시작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다소곳한 새댁처럼.
“예, 들어오시죠.” 형두가 현관문을 열었다.
수저를 놓는 손이 한없이 떨렸다. 수저가 민망한 듯이 딸그락거렸다.
“이두나 씨?” 형사는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가슴이 꽝 하고 소리를 냈다.
“예?… 저, 무슨 일이신지…” 몇 차례 심호흡을 했는데도 목소리가 떨렸다.
형사는 한 명이었다. 예상대로… 나머지 한 명은 집 밖 1층 베란다 쪽에 있을 게 뻔했다.
형사는 한 손에 두꺼운 내자 커버로 된 수첩을, 한 손에 모나미 펜을 들고 있었다.
“저번에 사이버 수사대에 수사 의뢰하신 적 있죠. 주상도 씨가 이두나 씨 괴롭힌다고. 문서, 전화, 투서, 이메일, 인터넷 블로그 등에서 괴롭힌다고 말입니다.”
역시 주상도와 연관된 일이었다. 곧이어 주상도의 강아지에 대해 물어올 게 뻔했다. 우리나라에 귀하다는 값비싼 라사압소에 대하여.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예, 그랬죠…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무래도 내 말투가 너무 딱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범인 검거됐습니다.”
“네?” 나는 들고 있는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예, 주상도 씨 말입니다.”
“네?”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주상도 씨에 대한 고소장이 들어오긴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계속 무혐의처분 되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협박, 성폭행 당한 피해자가 고소해왔습니다. 증거도 있구요.”
“…?”
“피의자에 대하여 물어볼 게 있는데… 협조…”
“저, 고소, 고소라 했죠? 누가 고소를 했나요?”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음, 임나영 씨라고… 연구원입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아, 아닙니다…” 그러면서 나는 한나 언니를 봤다. 한나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했다.
주상도가 임나영 오빠에게 뺨을 세 대씩이나 맞고도 다시 임나영을 찾아간 게 분명했다. 나는 쥐고 있던 주먹을 더 세게 쥐었다.
며칠 전 연구소 복도에서 주상도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그에게 낮은 목례를 했다. 마음속으로 그의 복을 빌어주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았는가.
“만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특히 거시기가 길어지는 복을요.” 그는 그 복을 마땅히 충분히 누렸음에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미나는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