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드디어 나는 죽었다.
아니 죽은 것은 형두였다.
“박형두, 박형두…”
한나 언니와 나는 형두를 흔들었다. 한나 언니는 울고 있었다. 한나 언니가 우는 것은 어릴 때 동네 꼬마가 언니의 사탕을 빼앗아 먹었을 때 보고 처음이었다. 동네 꼬마는 언니보다 한참 어린 꼬마였다. 언니는 울고 있었고 동네 꼬마는 언니를 빤히 보며 날름날름 사탕을 빨아먹고 있었다.
나는 한나 언니가 진심으로 형두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서럽고 지겨운 울음소리였다. 조금 있으니 형두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제, 정신이 나? 정신이?”
한나 언니가 울먹이며 물었다.
“으으…”
머리에 올려둔 찬 수건을 벗기며 형두가 일어나서 한 첫 번째 말은 이랬다.
“우리 손가락, 손가락, 어떻게 됐니?”
아니, 우리, 손가락, 이라니… 형두가 쓰러지더니 뇌 언어체계 문장 구사능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횡설수설했다. 혹시 그것은 우리 꽃병, 혹은 우리 인형, 혹은 우리 손톱깎이를 말하려다 나한테 좀 미안해서 두나야, 너 손가락 괜찮니? 라고 말해야지 했고 그런데도 그 ‘우리’라는 말이 함께 뇌 속에 끼어들면서 ‘우리’와 ‘손가락’이 결합하게 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형두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생각 안 나?” 한나 언니는 무용담을 들려주는 무사처럼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형두에게 다 말할 수는 없었다. 이를테면 내가 강만봉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한나 언니가 없던 용기를 내서 약수터에서 떠온 2리터짜리 들통의 물을 끼얹었다든지 갑작스런 물세례에 강만봉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사이 마침 뒤로 물러나다 발전용 자전거가 발뒤꿈치에 닿은 이두나가 발전용 배터리에 끼워져 있던 전선을 뽑아 물에 빠진 생쥐꼴인 강만봉의 젖은 바지 쪽에 던진 것이라든지 강만봉이 소리 하나 꽥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전기쇼크로 푸드드 떨며 쓰러진 것이라든지 그것을 보고 긴장의 극대치에 있던 형두가 그제사 쓰러진 강만봉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은 것이라든지 멱살을 잡다 자신도 전기쇼크에 잠시 기절하게 된 것이라든지… 뭐 이런 거 말이다. 물론 형두가 일어나기 직전 강만봉이 깨어나더니 히히히 온몸이 왜 이렇게 간지럽지 하면서 펄쩍펄쩍 뛰면서 몸을 긁어대자 한나 언니가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하고 묻는 말에도 히히거리기만 해 한나와 내가 전기쇼크로 정신이 좀 이상해졌나봐, 라고 말하며 저, 아무래도 병원에 같이 가봐야겠어요, 라고 말하자 강만봉은 다시 히히히, 병원은 무슨, 나 집에 갈 거야… 하고 밖으로 나가버린 거라든지… 하는 거 말이다.
언니는 형두가 왜 쓰러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기는 약하지만 자존심은 강한 남편의 기를 세워줘야겠다 생각한 것 같았다. 한나 언니가 기특해 보였다. 처음이었다.
맑고 쾌청한 초겨울 날씨다. 비온 뒤라서 날씨는 더욱 맑았다. 구름이 잘 구은 크루아상처럼 부풀어 있다. 아버지한테 전화를 받은 건 어제였다. 엄마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걱정이었다. 엄마에게 꿍쳐놓은 돈이 얼마 있다는 걸 안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나는 엄마 쌈짓돈을 밑천으로 석사학위에 들어간 것이다. 엄마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모아둔 돈이었다. 그건 엄마의 마지막 꿈 항아리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딸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대기발령자가 되어 버렸다.
평소 같으면 나는 전기차에 대한 1차 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책상 위 집기들은 이미 치워지고 없었다. 완벽한 대기발령자였다. 하긴 신기하기도 했다. 나에게 이토록 많은 시간이 있다니. 시간은 축복이고 저주였다. 그랬다. 모든 이들이 다 이사 떠난 텅 빈 공간 안에 나 혼자 남아 있는 듯한 느낌. 가슴속에 먼지와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텅 빈 시간 안에 나는 갇힌 셈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점심시간뿐이었다.
“야, 꼭 햄버거 먹어야겠어?” 나는 델리버거를 쩝쩝 씹으면서 말했다. 점심시간에 민진이 선택한 곳은 맥도날드였다.
“야, 너무 맛있잖아.” 민진이 우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주상도 소장, 올해 한국 최우수 과학자로 선정된 거 너 아니? 다음 주가 시상식이래.”
“…” 나는 아무 말 없이 햄버거를 씹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그건 알아줘야 해. 햄버거 햄 속에 소의 항문, 성기, 내장, 십이지장, 눈알, 다 들어간 거… 알어?”
“야, 소의 항문, 성기, 내장… 정말 맛있는데?” 민진은 낄낄대며 더 과장되게 입으로 쩝쩝 씹어댔다. 하긴 민진과 나의 식성이 외양만 다르지 일치하긴 했다. 민진의 점심메뉴가 햄버거, 나의 점심메뉴가 내장탕이나 꼬리곰탕이라면 둘의 재료는 비슷했다.
“한민진, 범죄계보학에서 가장 첫 번째 자리가 뭔지 알아?”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빨면서 내가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영화나 추리물에서 조폭들이 사시미칼이나 총을 들고 나오잖아.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 하지만 현혹되면 절대 안 돼. 지적 능력을 보강할 수 없는 자들이 현장에 무기를 갖고 나타나는 거야. 멍청이고 아마추어들이야.”
“범죄계보학에서 가장 고수가 누군데…”
민진이 콜라를 한 모금 빨면서 눈을 빤히 떴다.
“사기꾼들이지. 그들은 작업을 할 때 오직 자기의 얼굴만 드러내. 숨겨진 무기는 지적 능력과 교활함, 상상력, 상대방 심리를 간파하는 독심술 같은 거지. 다음으로는 도둑이야. 닭 도둑이든 자전거 도둑이든 확실한 방법으로 자신이 훔치고자 하는 것만을 목표로 작업을 해. 다이아몬드든 자동차든 그들은 전문가다운 윤리의식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서만 작업을 하지. 그 다음에 여러 범죄자들이 있지. 강간범, 묘지 도벌꾼들, 가짜 골동품상… 여기서 가장 질이 떨어지고 서열에서 맨 끝이 바로 강도야.”
“왜?”
민진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우선 그들은 칼이나 날카로운 뭔가를 무기로 갖고 다녀. 협박과 공갈용이지. 자신이 범죄자로서 전문적 능력이 따로 없으니까 칼 따위의 협박용 매개가 필요한 거야. 그런 식의 협박용 매개란 거 가장 저열하고 치사한 자들이나 갖고 다니는 거란 말이야.” 나는 흥분해서 말했다.
“하긴 협박은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인간 자존심을 담보로 게임을 하는 거니까. 가장 비굴한 돼지가 되는 느낌이라니까.” 민진이 의기소침해하며 말했다.
“너, 협박당한 적 있어?” 내가 물었다.
“이대팔이 어제 그러더라. 한민진 씨, 이번 프로젝트 통과 안 되면 사표 써야 할 걸? 헤죽헤죽 웃으며 그러는 거야. 그런 게 사시미칼 들이대며 협박하는 조폭이나 뭐가 달라…”
“다음 주에 인사 발표 난다는데… 대기 발령이니. 난 이미 끝난 거 같아. 비정규직마저 잘리면 난 어쩌냐?” 힘없이 말하는 이두나.
“뭐, 그러면 이번엔 우리가 강도를 협박하면 되겠지.” 민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떻게…”
“네 놈의 성기, 항문, 내장, 두뇌 다 갈아서 햄버거 만들어 먹겠다 하면서 말이야.”
민진이 깔깔대면 웃었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았다.
우리 집을 다녀간 강만봉을 생각했다. 강만봉의 성기, 항문, 내장, 두뇌를 다 갈아먹고 싶을 만큼의 분노가 일었다.
협박을 한다는 거, 그건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인간들이 하는 짓이다.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가장 연약한 감정을 순수하게 이용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