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
“왜?”
“양쪽 뺨을 세 대씩 맞든가 같이 총장한테 가든가 하자 했대.”
“뭐? 그래서?” 나는 한나 언니 얼굴에 바짝 내 얼굴을 갖다 댔다.
“주상도 그 작자가 한참을 고민하더래. 결국 양쪽 뺨을 세 대씩 맞겠다고. 그러자 임나영오빠는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는데 이태리타월, 때수건이었어. 그것을 오른손에 꼈대. 그러고선 뺨이 불이 나게 세 대씩 때렸나봐…”
“꼴좋았겠다.” 내가 말했다.
한나 언니 말대로 임나영을 만나보면 주상도에 대한 법적 대응 꺼리를 찾을 듯했다. 임나영은 마산에 있는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 근교에 살고 있고 주상도에게 성폭행을 당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뭔가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한나 언니는 슈퍼에서 락스와 세제를 사야 한다고 먼저 집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혼자서 걸었다. 아파트 쪽이었다. 진흙뻘 속에서 빠져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건 어두운 문틈 끝에서 희미하게 새어나는 빛처럼 내 마음을 흔들었다.
초겨울 저녁 공기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이제 고질적인 슬픔 따위는 잊어버리자. 주상도 소장, 너의 가엾은 영혼을 내가 천도해주마. 주꾸미 인간되게 해주겠어. 뭐, 인간이 주꾸미보다 꼭 더 훌륭하단 법은 없지만…
위안과 고통이 번갈아 지나갔다.
저녁이 다가오는 아파트 길은 오늘따라 사위가 조용하다. 밤이 으슥해지고 있었다. 아파트를 향해 가는 가로수길 옆 감나무가 보였다. 감나무 중간쯤에 채 따가지 않은 감이 달려 있었다. 길쭉하고 통통하게 살이 찐 잘 익은 감. 발갛게 된 고환 같았다. 그건 어떤 기다림 같기도 하고 불안 같기도 했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뒤쪽이었다. 아파트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내 발자국 소리가 있고 뒤 이어 다른 발자국 소리가 있다. 발자국소리는 똑같은 템포로 나를 뒤따랐다. 보도블록 위엔 포플러 잎이 누워 있었다. 누런 똥색이었다. 바스락. 내가 낙엽을 밟았다. 뒤이어 누군가가 밟았다. 내가 발을 떼면 뒤이어 누군가가 발을 뗐다.
머리카락이 쭈뼛 하고 섰다. 뒤통수가 당겼다. 뒤를 돌아보고 싶다. 돌아볼 수가 없다.
살금살금 걷기 시작한다. 천천히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휴대폰 금속 폴더를 어깨쯤에 올린다. 뒤쪽을 비쳐본다. 흐릿하다. 검은 물체다.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뜬다.
분명하다. 강만봉. 검은 야구모자를 쓰고 검은 잠바를 입고 있는… 그는 강만봉이다.
그의 가슴엔 보진 않았어도 붉은 전갈 문신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뒷주머니쯤에 망치까진 아니지만 스패너 하나쯤은 꽂혀 있을 것이다. 관리실에 있는 스패너는 강만봉이라면 볼트를 조이기 위한 용도 외에 다른 용도로도 충분히 사용될 것이다. 누군가의 뒷목을 치기 위한 용도 따위 말이다. 그는 가슴에 새겨진 전갈의 뾰족한 꼬리를 들어 내 뒤통수와 쇄골을 내리칠지도 모른다. 성적인 매력을 최대한 발산하는 내 신체의 자랑거리, 나의 쇄골 말이다. 건형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두나, 너의 쇄골은 동아시아를 대표할 만해. 그럼 당연하지, 내 쇄골은 물을 따라 마실 수 있을 만큼 훌륭해, 라고 말했던 쇄골.
몸에 강한 전류가 통과한 듯 입과 혀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머릿속 전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일단 36계 경공이 최고다. 한나 언니가 말했다. 불리한 땐 일단 도망가는 것이 최고라고.
하이힐을 벗었다. 가방을 옆에 끼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다다닥.
강만봉은 갑작스런 내 행동에 좀 놀란 듯했다.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뒤쫓아 뛰어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뛰면서 뒤를 돌아봤다. 강만봉이 내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다. 나는 젖 먹던 힘을 냈다. 숨이 찼다. 다시 뒤를 돌아봤다. 강만봉과의 거리가 좀 벌어져 있다.
나는 다리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더 힘을 내 뛰기 시작했다. 강만봉과의 거리가 더더욱 벌어졌다. 아파트 정문을 통과하고 주차장을 통과하고 뒤를 돌아봤다. 강만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 달렸다. 계속 달렸다. 맹렬하게 달렸다. 달리고 달려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현관문을 닫아걸었다. 상체를 숙이고 등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야?” 형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냐….”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움켜쥐고 손을 내저었다.
조금 있으니 초인종이 거칠게 울렸다. 현관 앞 화면 모니터를 봤다. 강만봉이었다.
“야… 이두나… 문 열어… 문 열란… 말이야…” 강만봉도 상체를 숙이고 등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숨을 고르고 있다.
“야… 너… 무슨… 여자가… 그렇게… 빨리… 뛰냐. 너무… 빨리… 달려서… 따라갈… 수가… 없잖아…” 숨을 헐떡이는 강만봉,
“일단… 너한테… 물어보자!” 말을 잇는 강만봉,
“뭐… 뭘 물어… 나… 당신하고… 말할 거… 없어…” 숨을 헐떡이는 이두나,
“너… 백 미터… 몇 초냐?”
“십오 초…”
“너… 백 미터 달리기… 선수였냐?”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강만봉,
“당연하지…”
“무슨 여자가… 다리에… 모터…달린 줄… 알았다…”
철제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강만봉과 나의 대화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둘 다 숨을 헐떡이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형두는 백 미터 달리기 시합이라도 한 사람을 쳐다보는 듯 얼빠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다. 밖이 잠잠해진 듯했다. 이제 갔나, 그렇게 생각하려는데 강만봉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숨을 다 고른 말투였다.
“야, 이두나 좋은 말할 때 문 열어!”
“못 열어. 무슨 일로 남의 집에 들어오겠다는 거야…” 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강만봉은 훨씬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누가 있는 줄 알아? 네 언니 이한나가 내 옆에 서 있네. 내 손에 뭐가 들려 있는 줄 알아? 꼭 보여줘야겠어?”
강만봉은 그렇게 말하고 아니나 다를까 스패너를 들고 현관 모니터 화면을 보며 자랑스럽게 흔들어댔다. 그 옆에 한나 언니가 불안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너 경찰 부를 줄 알아! 어디 집까지 찾아와서 행패야?” 내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형두가 나를 저지했다. 상대는 한나 언니를 볼모로 삼고 있었다.
형두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허공중에서 만난 서로의 눈빛은 갈등하고 있었다. 잠시 후 형두가 내게 짧은 고개 짓을 했다. 문을 열어주라는 뜻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형두가 잠깐, 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를 저지했다. 내가 주춤했다. 형두가 거실 쪽으로 갔다. 다시 부엌 쪽으로 갔다. 형두는 아마도 거실 베란다 쪽에 있는 훌라후프를 잡으려다 그건 전혀 무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다고 줄넘기 줄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서민아파트엔 골프채 따윈 없으니까. 형두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부엌에 식칼이 있긴 했다. 형두가 식사준비를 할 때마다 늘 쓰던 독일제 쌍둥이표 부엌칼. 하지만 요리를 할 때와 긴급할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잡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형두는 부엌칼을 잡는 것을 포기했다.
형두는 손을 떨고 있었다. 망설이다 기껏 잡은 것은 먼지떨이였다. 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심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착륙이 임시비행장이 아닌 듯했다. 상어 떼가 득실대는 바다에 추락한 게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