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여자가 말하지 않은 것도 있어.” 형두가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말했다.
“뭔데…” 나는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고 몸을 한 번 기우뚱했다.
“그러니까… 여자는 주상도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어. 구두, 화장품, 악세사리에서부터 핸드백, 옷, 컴퓨터까지.”
“뭐 컴퓨터까지?”
“주상도는 여자한테 계속 자자고 졸랐던 것 같아. 여자가 말을 안 들으니까 약이 올라 여자 집으로 쳐들어간 거구. 그리고 자기를 안 만날 거면 선물한 것들 다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지른 거야.”
“정말 치사의 극치다. 유치해. 그렇게 완벽한 남자가…”
“…”
“헤어질 때 선물한 거 다 내놓으라고 말하는 남자, 정말 인간성 바닥이야.”
다음이 우리 아파트 앞이란 안내방송이 나왔다. 버스에서 내렸다. 가로등이 환했다. 어둠이 이미 깊어졌다. 경사 진 아파트 앞 입구길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유리창을 부순 건 사실이야. 아파트 동네에서 다 알게 됐지. 여자가 이사비용과 유리창 변상용으로 주상도한테 돈 삼천만 원을 요구했대. 그 전엔 여자의 소나타 자동차도 부순 전적도 있었거든…”
“야, 근데 넌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는 감탄 섞인 눈빛으로 형두를 봤다. 도둑고양이가 휙 하고 길을 가로질러 달렸다.
“야, 내가 예전에 논문 쓸 때 지도교수가 자네는 다른 건 몰라도 연구사 정리는 확실하군… 그랬단 말이야. 내가 이래 뵈도 기존 연구사 정리는 확실하지. 배경 조사 말이야.” “뒷조사는 아니고?” 나는 쿡 하고 웃었다.
“하여간… 여자는 컴퓨터 옆에 주상도가 준 노래가사를 붙여놓고 따라 부르기도 했나봐. 결국 노래고 낭만이고 주상도가 야구방망이로 복도 쪽 아파트 유리창을 깨는 바람에 다 날아가긴 했지만…”
주상도가 여자에게 원했던 게 뭘까. 바둑돌처럼 자기 마음대로 그녀가 움직이길 원했던 걸까. 그는 완벽한 신사고 포악한 독재자였다.
아파트가 보였다. 멀리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무질서한 음악의 음들처럼. 자동차 소리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숲이 어둠 속에서 술렁거렸다. 가로수 사이로 미지근한 밤이 내렸다. 나는 뒤에서 비치는 네온 빛을 받으며 보도블록을 올라갔다. 노란 헤드라이트가 눈부신 기둥을 바닥에 비쳐주자 무수한 빛들이 번졌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질주하며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했다. 저 빛 속에 여러 가지 욕망이 감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제 각각 자신의 욕망을 살아갈 뿐이었다.
역광을 받으며 눈 덮인 광야를 걷는 사람처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형두가 말했다.
“너 브래지어 벗어서 나 줘.”
“뭐?”
“너 와이어 브래지어에 장착된 배터리… 녹음도 되는 수신기야. 내가 송신기에서 센서로 녹음 버튼을 눌러놨거든. 영자 씨 이야기 다 녹음됐을 거야”
기절하는 줄 알았다.
혼자 수사대를 찾아갔다. 사이버 수사대 경위는 나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이거로는 안 됩니다. 부족해요. 피해자 여성이 설사 기물파손이나 감정적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이미 가해자로부터 물질적 보상을 받은 셈이잖아요. 그럼 서로 합의가 된 셈이니까 고소 건으로서는 실효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영자 씨가 삼천만 원만 받지 않았어도 주상도는 충분히 잡아넣을 수 있다. 그러나 주상도는 정신 나간 오랑우탄이 저지른 일들을 대체로 수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자들’ 폴더에 있는 다른 여자에 대한 파일을 찾는 일도 의미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맥이 풀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버스가 급정거하다 누군가가 내 발을 밟았다. 그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 했다.
나는 그날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연구소 사무실 내 책상과 의자가 치워지고 없었다. 갑작스런 인사통보. 대기 발령 통보였다.
그렇다고 책상과 의자까지 치우다니. 이런 거였어? 결국?
연구소 연구원들의 눈빛은 참, 안됐다는 뜻인지. 참, 잘됐다는 뜻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적어도 그들이 내 발을 당장 밟은 건 아니지만 모두 공모자 같았다. 이대팔과 손진영 과장은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나는 하루 종일 연구원 휴게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점심 때 민진과 현수와 밥만 먹었다.
어떤 피임법도 모른 채 임신을 해버린 여자애처럼,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연구소에서 대기발령 통보받았다 말하면 형두와 한나 언니는 뭐라 그럴까. 사이버 수사대 일도 진척이 없는데… 기운이 빠졌다.
나는 ‘기운 내, 이두나. 죽지 않았어!’ 나직하게 중얼거려 보았다.
아파트 현관문을 통과하는데 철제 우편함에 뭔가가 보였다. 큰 각대봉투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주상도의 두 번째 공격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가 이번엔 어떤 걸 넣었을까. 이번에 돼지 성기나 닭 발톱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각대봉투는 좁은 우편함에서 몸을 빼려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각대봉투를 꺼냈다.
보내온 사람의 이름을 봤다. 건형, 박건형이었다. 아, 건형이구나…
신선한 햇살을 만지듯 나는 각대봉투를 쓸어내렸다. 역시 건형은 낭만적이고 멋진 남자다. 갑자기 콧노래가 나왔다. 봉투에 코를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향수를 뿌린 꽃무늬 카드거나 음악회 초대권일지도 몰랐다.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봉투를 예쁘게 가위로 잘라 열었다.
“누가 보낸 거야?”
“건형이가 보냈어…”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이두나.
“와우, 좋겠다… 늦게 든 노망이 더 심한 노망이라니까.” 한나 언니와 형두가 낄낄댔다.
“악~”
나는 내용물을 들여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 유리가 되었다. 다시 돌덩이가 되고 폭풍이 되어 날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게로 와 박혔다. 온몸이 파편으로 일그러진 느낌이다.
“응,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응? 네 사진이잖아? 너네 사진도 같이 찍었니?” 형두가 사진을 빼앗듯 가져갔다.
물론 그 사진은 건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 아니었다. 주상도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시간은 저녁 무렵이고 배경은 모텔입구였다. 주상도와 강원도 풍력발전소에 갔을 때 들어갔던 모텔. 주상도와 내가 함께 모텔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발전소 직원이 잡아둔 모텔이었다. 사진은 뭔가를 열심히 증명하기 위한 증명사진 같았다. 두 번째 사진은 주상도가 차에서 나에게 강제로 키스했었던 때. 그러나 사진엔 주상도와 내 얼굴이 연인처럼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주상도가 자기 차안에 셀카를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어떻게 이 사진이 건형에게 전달되었는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건형은 짧은 메모를 남겼다. 더 이상 나를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메모였다. 사진 상으로 나는 건형을 두고 딴 유부남과 관계를 가져온 배신자에 불과했다. 이건 완벽한 모략이었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혀가 잘린 배교자같이 느껴졌다. 바깥 세계로부터 오는 공격에 저항할 수도, 살 수도 없게 된 느낌이 들었다.
“야, 이건 완전히 음모잖아. 건형이가 이런 사진을 보고 너를 오해하는 건 잘못이지. 건형이를 만나봐. 오해를 풀어야지.” 한나 언니와 형두가 한마디씩 했다.
나는 몸을 덜덜 떨면서 천천히 앞을 응시했다.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아악, 어떻게… 어떻하냐고… 건형이는 이런 거 절대로 용서하는 사람 아니야.”
“야, 건형이한테 말도 안 꺼내보고 그래, 오해가 있었을 거야.” 한나 언니가 말했다.
“윽, 아니야. 내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소용없어. 건형이가 한번 헤어지자 하면 그것으로 끝이야. 다시 번복하는 남자가 아니란 말이야. 건형이는 그래.”
한 통의 편지만큼이나 선명하고 순수한 것은 없다. 그건 내게 분명 아픔을 주는 편지와 사진이었다. 결정적이고 정교하고 완전하고 분명한. 편지와 사진은 단호하면서 결정적인 말을 하고 있었다. 넌 끝장이야.
나는 사진을 보면서 소리쳤다. 이건 모두 가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