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기원은 성북동쪽이었다.
대학로에서 미아리 쪽으로 올라가는 고갯길, 주택가와 유흥가가 섞인 거리 뒷골목이었다. 24시간 편의점을 끼고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빈대떡집, 소주방, 양곱창구이집, 화덕구이와 싸구려 횟집이 늘어서 있었다. 중년 사내들이 대로변에 의자를 내놓고 왁자지껄하게 양곱창을 구워먹고 있다. 퇴락한 듯한 뒷골목. 고기 굽는 연기 사이로 소주잔을 들이키는 사내들의 욕망들이 서로 부딪치다 허공중에 사라졌다. 네온 속에서 빛과 색이 생멸하듯 밤이 무르익고 있다.
네온사인 사이에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는 이층 건물이 보였다. 붉은 벽돌 건물에 가로로 길죽하게 ‘삼거리 기원’이란 간판이 보였다. 번쩍번쩍 빛을 뿜어내는 이층이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뒤를 돌아봤다. 계단 아래 형두가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파이팅이라 외치고 있었다.
주인은 좀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파란색 츄리닝에 양쪽으로 머리를 질끈 묶고 헤어밴드를 한 여자가 조깅을 하다 행인에게 길을 묻기 위해 잠깐 멈춰선 것처럼 헉헉대고 있었다.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간 것이다. 헤어밴드를 한 여자는 어리다고 하기엔 좀 나이가 들어 보이고 나이가 들었다고 하기엔 어린 티를 내려 갖은 애를 다 쓴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안경 너머로 눈을 반짝이며 주인에게 물었다.
“저 영자라는 여자, 여기서 일한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기원의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인테리어였다. 테이블과 탁자가 엔틱했다. 최근에 리모델링한 느낌이 들었다.
창가 쪽에 앉아 있던 사내가 불그스레한 얼굴로 일어났다. 사내는 화장실을 찾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이시죠?” 기원의 주인은 오십대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때 앞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 하나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찾으시는 거예요?” 여자는 검은 반짝이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스팽글이 잔뜩 달린 거였다.
“정말 몇 가지 이야기만 하고 시당 배로 주는 거 맞죠?”
여자는 마스카라가 번진 눈을 깜박이며 형두를 쳐다봤다. 여자는 광대뼈 쪽에 조금씩 올라오는 기미를 콤팩트로 두껍게 가리고 있었다. 기원에서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기미가 거뭇하게 파운데이션 너머로 비쳤다. 아이섀도는 스모키 화장을 하고 입술은 샤넬 레드 계열 립스틱이었다. 의자를 당기기 위해 상체를 잠깐 일으키자 싸구려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짓붉게 바른 립스틱만 아니어도 여성스럽고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예, 시당 배로 쳐드리죠” 형두가 재빨리 말했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았다. 여자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녹음하고 그러면… 전 아무 말 안할래요.” 영자 얼굴이 딱딱한 널빤지처럼 굳어졌다. 그리곤 입을 꼭 다무는 시늉을 했다.
“정 그러시면 녹음기 치우겠습니다.” 형두가 또 재빨리 녹음기를 가방에 넣었다.
녹음하기에 장소가 적당치도 않았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프렌치프라이를 케첩에 찍어 먹거나 콜라를 쭉쭉 빨대로 빨고 있었다. 주문대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채 메뉴판을 보며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마침 유모차 안에 누워 있던 애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필 이런 곳이라니.
맥도날드였다.
“이혼하고 기원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만났어요. 처음에 단골인가 했는데 올 때마다 절 찾더군요. 거의 매일 찾아오다시피 했어요.” 여자는 순진한 눈빛으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자몽 주스를 빨대로 빨았다. 하얀 빨대에 주스가 쑥 하고 빨려 올라가자 붉은 혈관처럼 낯설어 보였다.
“영자 씨도 좋아했겠네요. 매상을 올려주니까.” 형두가 말했다.
“처음엔 나쁘지 않았죠. 제 이야기도 상세하게 들어주고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낭만적으로 변하려 했다.
영자 씨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 남자와 잠자리를 한 두 여자가 그 남자 섹스 절정에서 어떤 소리를 지르냐고 서로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화적인 사람이죠.” 나는 연애이야기를 들어주는 다정한 친구처럼 눈을 깜박였다.
“자기는 외로운 사람이고…” 늘 말하는 수법이 똑같군…
“자기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고…” 말하는 버전 좀 업데이트하시지…
“자기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여자들 괴롭히는 거야?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집착이 심해졌어요. 부부 관계까지 다 말하고…”
“그런 이야기, 과대노출증 같은 이야기를 왜 하는 거죠? 영자 씨가 창부도 아닌데.”
나는 여자의 분노를 일으키고 싶었다. 여자는 그리 엄격한 성격도 독한 성격도 아니었다. 대개의 여자가 그렇듯. 행인을 앞지르며 위협적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며 자동차를 욕하기보다 자신이 무사함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 약한 여자 중 하나였다.
영자 씨는 입가를 조금 떨었다. 눈을 조심스럽게 깔았다. 앞으로 내려온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 그러게요…”
“그건 성희롱이죠. 당연히…”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그렇죠. 그렇지만 그 사람, 너무 완벽한 남자잖아요. 박사에다 수재에다 최고의 엘리트. 얼굴도 잘생겼고 신사적이고 우아하고 젠틀하고… 냉정한 듯하지만 여자의 마음을 끄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그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었어요. 음… 아내 되는 사람이 좀 그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려 불쾌하다 하더라구요. 밥 먹고 칫솔질 안 하고 이쑤시개 쓴다거나 매일 샤워하지 않는다고… 공부는 수재면서 어쩜, 이렇게 촌스러워? 하면서… 그 사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곧잘 했다 하대요. 가난한 집 출신은 어쩔 수 없다는 둥하면서… 그 사람이 좀 안되어 보였어요.”
“그래서 서로 좋은 애인관계가 된 거군요.”
“그렇지만 그 사람 너무 난폭하게 저한테 굴었어요. 집착도 심하고… 만나주지 않으면 집까지 찾아오고… 문을 안 열어주니까 자동차 부수고 복도 쪽 유리창 다 부수고 말이 아니었어요. 이웃들이 다 나와 무슨 일이냐고… 완전 망신이었죠.”
“정말 곤란했겠네요.” 나는 진심으로 여자를 위로했다.
“뭘로 부셨죠?” 형두는 사건현황을 조사하는 형사처럼 진지했다.
“야구방망이요… 전 혼자였고 너무 무서웠어요.” 여자가 약하게 떨었다. 그리곤 체크무늬 숄로 자신의 몸을 세게 감쌌다. 풍만한 가슴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