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그들이 컴퓨터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림자는 커튼의 한쪽을 꽉 쥐었다. 진땀이 났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림자는 다시 놀라 제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가까스로 커튼을 잡고 몸의 균형을 찾는다. 다행히 휴대폰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많이 들어본 발신음 노래, 윤하의 노래 <기다리다>였다. 자신의 딸이 다운받은 거라며 자랑했던 이대팔, 이대팔 휴대폰의 발신음.
“응, 그래… 여기?… 아니야. 집 근처… 응, 그럼, 금방… 그래… 알았다니까….”
이대팔은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끊었다.
“나, 빨리 들어가 봐야겠어… 집사람이 찾는데… 집에 일이 있나봐…”
“뭐야, 자기는, 항상 이러기야…” 이구선이 귀여운 앙탈을 부렸다. 자신의 배역다운 대사였다.
사람들은 모두 감추고 싶은 비밀을 한 가지씩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기억의 보존과도 관계있고 육체적 욕망과도 관계있다. 때로 유년의 상처, 신체적 폭력과도 관계있다. 사람들은 땅 속에 김장김치가 잘 익어가듯 비밀이 잘 익어가도록 가둬둔다. 사실 그것은 십대 남자애가 서랍에 콘돔을 숨겨두듯 십대 여자애가 빈집에서 여자 친구랑 키스를 하듯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비밀의 당사자들은 흥분하여 따귀를 때릴지도 모를 일이다. 잘 익힌 자신의 양식을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잘 간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구선과 이대팔이 급하게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림자는 그제야 천천히 커튼 뒤에서 나왔다. 그림자는, 나는, 다시 머리에 쓴 랜턴 전구를 켰다. 워킹테이블 위에 몇 개의 스팽글 조각이 반짝이며 떨어져 있다. 여자는 자신의 비밀을 간직하는 법에 서툰 게 틀림없다. 나는 빙긋 웃음을 날렸다.
주꾸미의 파일은 대용량이었다. 파일을 담아둔 폴더명은 ‘여자들’…
여자들이라니. 그는 문학적 은유도 상징도 모르는 단순무식과였다. 여성을 위해 준비해놓은 오랜 은유들은 많다. 고양이, 낙원, 꽃, 조가비… 아니면 자신만이 아는 암호명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방사능, 두뇌골, 위경련, 복상사… 생각해보면 제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주꾸미는 자신의 비밀 자물쇠를 암호 없이 채워둔 거나 다름없다.
‘여자들’ 폴더 안에는 영자, 두나, 나영. 세 명의 여자 이름이 있었다. 파일은 데이터베이스 자료처럼 체계적으로 분리, 분류, 분석되어 있었다. 박사논문감이었다.
[이두나, 엽기적인 부분도 있지만 귀엽다.]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엽기적? 내가 뭐가 엽기적이란 거야?
충격적이게도 그것은 사진으로 증명되고 있었다. 그건 내가 사무실에서 사람들 몰래 코를 후비는 장면. 사진2는 팬티고무줄 자국을 벅벅 긁고 있는 장면, 사진3은 강원도 풍력발전소에 갔을 때 바람에 스커트가 날려 내 면 팬티가 다 보이던 사진…이었다.
처참했다. 그건 이두나의 실상이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삶의 사적인 부분들은 상대를 이해하는 데 공적인 부분만큼 위협적이다. 내가 코를 후빈다거나 팬티 고무줄자국을 벅벅 긁고 있다고 해서 뭐 어떻다는 건가. 하지만 그건 분명 나의 이미지를 위협하는 것들이다. 특정 신체 부위를 후비고 긁고 쑤시고 튕겨내는 장면들. 이건 나의 지적이고 세련된 사회적 능력을 의심하게 하는 장면이다. 주상도는 아주 특이한 여성취향을 가진 게 틀림없다. 창문 앞 햇빛을 받으며 이두나가 연구소 부원들과 대화하고 있는 세련된 장면, 차를 마시며 단아하게 앉아 있는 몇몇 사진도 있었다.
나는 입이 튀어나온 표정으로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난 왜 이렇게 ‘사진빨’이 안 받지?
“뭐, 좀 찾는 거 나왔어?” 형두였다.
“으응… 찾고 있는 중이야.”
나는 이두나 파일에서 영자 파일로 옮겨갔다.
영자…라…
파일에 그녀가 있는 곳이 나와 있었다. ‘삼거리 기원’…
영자는 기원에서 서빙하는 여자였다. 주상도가 바둑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영자라는 사람부터 만나봐야겠어… 기원에서 일하는 거 같아.” 내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응? 그래? 그럼, 네가 저번에 개발한 송신기와 발신기를 사용해보는 게 어때? 혹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저번에 네가 연구소 잠입했을 때도 들킬 뻔했다면서…”
“응, 그거 좋은 생각이야.” 나는 반색을 하며 형두를 봤다. 기특한 것…
“그러니까 내가 기원 밖에서 망을 보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발신기로 신호를 보내는 거야. 목걸이에 송신 신호를 받는 전구를 달아놓으면 돼. 배터리는 브래지어 안에 장착하면 되고…”
전투적이고 명민한 협력자가 말했다.
“뭐?” 내가 소리를 지르자 형두는 깜찍하게 한쪽 눈을 깜박였다. 형두는 여성 속옷의 내구성과 기능적인 면까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끔찍한 것… 내 브래지어에 와이어가 들어간 것까지 알고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