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라 ―선인의 경구
토요일 저녁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몹시 추웠다. 해가 들고 나기를 반복하더니 숨어버렸다. 부슬비가 내렸다. 해가 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개가 몰려왔다. 한국 녹색 에너지 연구소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틈입했다. 그림자는 날렵했다. 전문가처럼 보였다. 그는 준비해온 출입증 전자카드를 현관 잠금장치에 댔다. 현관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그림자는 복면을 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림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연구소 모든 도면을 미리 숙지한 듯했다. 복도를 지나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목표공간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에서 훈련받은 요원인지도 모른다.
그가 다다른 곳은 주상도 소장의 연구실이었다. 준비해온 열쇠로 문을 땄다. 그에게 그런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처럼 보였다. 연구실 내부로 들어오자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 랜턴에 스위치를 넣었다. 불이 들어왔다. 헤어밴드에 전구를 달아 만든 임시용 랜턴이었다. 책상 앞으로 가 컴퓨터를 켰다. 그림자는 산업스파인지도 모른다. 전력은행과 관련된 프로젝트 기밀을 대기업에 팔아넘기려는.
그는 침착하게 컴퓨터 마우스를 오른손 검지로 긁었다. 파일을 찾고 있는 듯했다. 순간 복면을 쓴 그의 눈에 뭔가 반짝하고 들어왔다.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한 듯 그는 약한 미소를 띠었다. 파일을 전송하기 시작했다. 파일 전송이 막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복도에서 소리가 났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였다. 그림자는 꽤 놀란 듯했다. 흠칫 몸을 움츠렸다. 발자국은 연구실 앞에 멈췄다. 발자국이 연구실 문을 열쇠로 따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주상도 소장이 분명했다. 그림자는 흡― 하고 숨을 멈췄다. 컴퓨터 화면을 봤다. 파일 전송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우선 그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 스위치를 껐다. 컴퓨터 모니터는 다시 맹인처럼 깜깜하게 눈을 감았다.
그림자는 재빨리 커튼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는 별별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다 가르치고 있다. 고급스럽게는 와인 에티켓, 명화 감상법, 승마부터 소소하게는 강아지가 구토를 할 때 멈추게 하는 법, 남성 조직원이 여성으로 변장해 하이힐을 신게 될 때의 걸음걸이까지…
하지만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주말 그것도 비가 오는 저녁에 자신의 연구실에 연구를 하러 들어오는 연구원은 거의 없다. 다른 불순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연구실 불이 켜졌다. 발자국이 불을 켰다. 발자국은 천천히 걸어 워킹테이블 쪽 의자로 갔다. 의자에 앉더니 양다리를 들어 테이블 위에 턱하고 꼬아서 올려놓았다. 거만한 자세였다.
그림자는 커튼 뒤에서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다리를 보았다. 그건 남자의 다리가 아니었다. 맨다리가 드러난 여자의 다리. 여자는 미니를 입고 있었다. 허연 다리가 다 드러난 채였다.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림자는 가슴이 뛰었다. 비가 오고 주말 밤이고… 주상도 소장의 연구실에 이 여자는… 어쩌면 여자는 귀신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다리를 풀고 티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시디를 확인하더니 오디오 버튼을 눌렀다. 올드팝이었다. 여자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이며 워킹테이블로 돌아갔다. 여자는 다시 다리를 올려놓았다. 다리를 꼰 채로 음악에 맞춰 발을 까닥였다. 잡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다. 그림자는 오줌이 마려웠다. 긴장하면 자주 일어나는 현상 중에 하나다. 조직에서는 이런 생리적 현상까지 조절하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림자는 조금씩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다시 발자국 소리. 이번엔 좀더 묵직한 소리였다. 발자국은 주상도 소장 연구실 앞에 멈췄다. 또 다른 발자국은 연구실로 들어왔다.
“언제 왔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 그림자는 가슴을 조이며 기다렸다.
“좀 됐어…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코맹맹이 목소리, 애교가 넘쳐 느끼했다. 익숙한 목소리… 누구지?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그것은 상대에게서 항상 곤란한 약점들만을 골라내는 악마적인 능력을 가진 자, 누군가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자의 목소리였다. 이구선, 그녀였다.
이구선은 가슴이 패인 검은 색 카디건에 빨간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넥라인에 금색스팽글이 골고루 박혀 있어 금방이라도 남성이란 동물을 유혹할 만해 보였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 하지는 않았다. 이구선은 스팽글이 달린 윗도리를 훌러덩 벗었다. 노브라였다. 쳇, 신경 많이 썼군. 그림자는 생각했다. 또 다른 목소리가 음흉하게 웃었다. 스커트를 입은 채 상의를 벗어버린 여성과 상의를 입은 채 바지를 벗은 남성이 워킹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워킹테이블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늘상 연구원들이 함께 회의를 하고 차를 마시던 테이블이었다. 워킹테이블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작은 신음소리를 내는 것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혼신의 힘으로. “끼익끼익~”
그림자는 커튼 뒤에서 여자 위에 올라가 있는 남자의 허연 엉덩이를 봤다. 살찌고 쳐진 엉덩이였다. 아래위로 운동을 할 때마다 살찐 엉덩이가 함께 출렁거렸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유리창 밖에 비가 왔다. 연구실 내에 그들만의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자가 외마디의 신음소리를 질러댔다. 곧 절정이었다. 그들은 더욱 힘을 냈다. 그리곤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테이블은 네 개의 다리로 육중한 남녀의 흔들림을 견뎌냈다. 장한 풍경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벗어놓은 옷을 입는 데도 재빨랐다. 밥을 먹고 입가를 티슈로 닦는 사람처럼 이구선이 아랫도리를 티슈로 닦아 내고 있었다.
“내가 괜찮은 야동 사이트를 찾았는데 보여줄까?” 헐떡거림이 잦아들자 남자가 말했다.
“뭔데…” 여자가 이어 말했다.
“여기서 봐도 될까?”
“뭐 어때… 내 연구실도 아닌데… 전산실에서는 주상도가 야동사이트 접속한 걸로 나올 걸?”
그러곤 그들은 낄낄대며 한참을 웃었다. 그림자는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오줌을 찔금 지린 것도 같다. ‘야동 사이트라고?’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에서 이런 경우를 대비하는 것은 가르쳐준 적이 없다. 컴퓨터는 ‘ON'상태였다. 모니터 화면이 꺼져 있을 뿐 파란불이 깜박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