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생전에 한번도 느끼지 못한 고통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주꾸미가 내 뒤를 밟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는 제 3의 눈으로 뒤를 쫓고 있었다. 건형이와 모텔에 들어가는 것까지. 어쩌면 그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겨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형과 들어간 모텔 방안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전기 광학 전문가였다. 그는 단순하고 멍청한 전기 전문가가 아니다.
주상도는 모텔 앞에서 우리가 들어간 객실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면서 온몸의 살을 떨었을 것이다. 핏물이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며 질투의 복수극을 자신에게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차분하고 냉정한 전문가답게. 뭔가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분별없는 집착이 그를 휩싸고 있었다. 그건 자기 권력애에 사로잡힌 열정 같기도 했다. 자기 권력욕에 싸인 자들은 제 영혼에 악마가 틈입하도록 방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류에 빠진다. 악성 형질에 매료되어 자신의 영혼이 파괴되는지도 모른다.
비명이 목구멍에 끼어 버둥거렸다.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 목에서는 희미한 신음 소리만 흘러나왔다.
“그 작자가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다 뒤쫓고 있어… 아, 어떻게… 어떻게 하냐고…”
나는 온몸을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끈질긴 거미줄에 온몸이 칭칭 감긴 느낌이다.
이번엔 문자였다. 나는 발작적으로 일어나 휴대전화 폴더를 열었다. 주상도였다. 어쩌면 그는 모텔방에서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뿌리겠다고 협박해올지도 모른다.
[두나씨, 오늘 형부와 한나 언니의 결혼기념일이네요.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
응, 이 작자가 이런 거까지?
“오늘 한나 언니와 형두 결혼기념일이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으응, 그래, 그런데 전화국에서 알림 서비스가 너한테로 오는 거야?” 형두가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으윽! 이 자식… 우리 가족의 사생활까지 손을 뻗치고 있어? 미친놈, @#$%^&*~. 그냥 안 두겠어!”
나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진심으로 분노가 일었다.
“두나야, 네 심정 잘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학력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교양 없다.” 또 형두가 멍청했다.
“야, 지금 교양 운운하게 생겼어? 호모를 사주해서 그놈 엉덩이에 불이 나게 해주겠어.”
“그건, 아무래도 너무 저질이다. 좀더 냉정하고 이성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번엔 한나 언니가 응수를 했다.
“그놈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애원이 나오게 하겠어.”
“응, 그 정도는 괜찮은 표현이다.” 한나 언니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주먹을 쥐고 말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주상도 소장의 약점을 잡아 뒤통수를 때리는 거야. 누구를 막론하고 딴사람한테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한두 가지는 있게 마련이지.”
“근데 어떻게 소장의 비밀을 캐냐?” 형두가 물었다.
“그거야 식은 죽 먹기지. 항문의 주름 수까지 낱낱이 세어서 조사해버리는 거야.”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한나 언니와 형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한나 언니가 말했다.
“그래, 좋아. 우리도 도울게. 우리 옛날부터 독수리 삼형제였잖아.” 우리는 의기투합한 레지스탕스처럼 서로의 손을 잡았다. 형두가 너무 세게 잡았는지 손이 아팠다. 하지만 빼진 못했다. 나는 동맹을 맺은 동지들 한 명 한 명에게 의미 있는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였다. 레지스탕스들은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눈빛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