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나 건형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
“이미 시작했잖아.”
“아니 육체적으로 신체발기적으로 진지하게.” 내가 말했다.
민진이 음식을 잘못 넘긴 사람처럼 캑캑거렸다.
“흠, 흠, 그래? 육체를 소비하기 시작했군… 어땠어?” 민진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물었다.
“기차만 한 운석이랑 꽝 충돌하는 기분?”
“몸부림치는 한 쌍의 두더지였겠군.”
“육체에 정직하게 반응한 것뿐이야. 이제 환상과 환멸을 오락가락하겠지? 오, 나의 로미오, 채찍으로 갈겨줘요. 그래 그렇게… 음 좋아, 더 세게… 음 좋아… 음, 거기. 좋아… 이렇게 되겠지. 야, 신난다…” 나는 미소를 짓고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온몸에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신났군!”
“야, 한민진, 나 가죽 채찍 하나 선물해줘라. 아주 섹시한 거루다가.” 나는 킥킥대며 익살을 떨었다.
“고목나무에 꽃피겠군. 난 네가 꽃도 못 피우고 폐경 맞는 줄 알았는데…”
“무슨 말이야. 모든 역사는 육체를 도모하면서 이루어지는 거야. 예감이 좋아.”
“7회 연속 실연기록을 갱신 중이더니 이제 살판났군…”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역전 홈런도 있는 법.
민진이 말을 이었다.
“섹스가 반드시 두 사람이 친밀해지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아. 오히려 깨뜨릴 수도 있어.”
“무슨 말이야.”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좀 더 험난한 과정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섹스를 나눌 수도 있어. 마치 책을 사두고 그것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건형이와 난 충분히 그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어. 그전에 사귀던 관계였으니까.”
“그건 3년 전 일이고….”
“3년 뒤에 갑자기 외계인이라도 되었단 거야 뭐야?”
“된 지도 모르지. 사람은 변하고 변하니까. 어제 마음 다르고 오늘 마음 다르니까.”
“그런 식의 절대적 상대주의는 신물 나. 여자 혼자 사는데 나이까지 먹어봐. 그게 바로 막다른 골목이지.”
“막다른 골목이라고 아무 곳이나 막 달리지 말라는 거야.” 민진은 언니처럼 점잖게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민진은 건형이 아직 이혼 서류를 정리하지 않은 일을 염려하는지 몰랐다.
이혼이라. 서류라. 인간은 서류, 제도, 체면, 위신 따위를 지키느라 전 생애를 다 보낼지도 모른다. 민진의 말대로 인간은 평생 알을 낳고 일만 하다 죽는 저 불운한 작은 개미보다 못한 존재일지 모른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 알 수가 없다.
생성광학 연구소 공개 강의 날짜가 다음날이었다. 나는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파워포인트로 작업한 문서를 다시 살피고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연습할 요량이었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두는 것도 좋을 일이다.
현관을 들어섰다. 형두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꽃게탕 냄새였다. 형두는 캥거루 두 마리가 다정하게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맛보고 있던 중이다. 형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귀여운 녀석… 식탁 위엔 장미꽃이 병에 꽂혀 있다. 촛불까지 켜져 있다.
“응? 오늘 무슨 날이야? 한나 언니는?”
“응, 오늘 일찍 온다고 했어.”
“응…”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씻지도 않고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쪽을 보면서 양쪽으로 머리를 묶었다. 스커트를 벗고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파일을 열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파일을 중간 정도 읽어갈 무렵이었다. 한나 언니가 들어오는 현관문 소리가 났다.
“음, 냄새 죽이는데?” 한나 언니는 잔뜩 기분이 고조된 모습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그때 휴대 전화가 왔다. 생성광학 연구소 선배였다.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뭐? 뭐라고요?”
나는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뭐야, 뭐라는 거야?” 한나 언니가 나를 보며 물었다.
“투서 건으로 해서… 내일 공개 강의 나 못 하게 됐대…” 나는 떨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느닷없는 기습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오다니.
“그쪽 인사과에서 지금까지 임원회의하고 내린 결론이래… 내 논문 표절시비에 대한 투서였어…” 혼이 나간 듯한 이두나의 목소리,
“뭐야? 또 그 주꾸미 짓이야? 도대체 그 작자 뭐하는 작자야? 왜 이렇게 끈질기냐?”
다시 휴대전화였다. 낯모르는 번호. 나는 미친 듯이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휴대전화를 끊었다.
“뭐야, 뭐냐니까… 또 뭐야. 누구한테 온 거야?” 한나 언니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한없이 갈라지고 있다.
“주꾸미야.”
“주꾸미? 그래 주꾸미가 뭐라고 해? 응?” 방에 따라 들어온 형두가 물었다.
“어젯밤 내가 누구와 어디에 갔는지 다 알고 있다고…”
“뭐? 너 누구랑 어디에 갔는데… 그걸 또 어떻게 주꾸미가 안다는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