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어떻게… 두나야, 너 논문 표절 시비 건, 인사위원회에서 회의해서 이번 달 말에 결정된다고 하던데… 인사위원회 통보 오기 전에 악성 메일 보낸 사람 찾아야 하잖아… 큰일이다.”
민진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봤다.
“…” 나는 아무 말 없이 땅만 쳐다봤다.
“이대로 당할 거야?” 민진이 말했다.
이두나는 논문을 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라는 이유만으로 표절이라. 이런 류의 표절 혐의, 범죄의 재구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대로 오려온 것이 아니라면 표절 시비 기준은 모호하다. 삶이 모호하듯이. 그야말로 ‘오야’ 마음에 달려 있다. 위원회 간부들은 소장의 지시만을 쳐다볼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뻔했다.
“그럼, 어쩌라고?” 나는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빼먹고 그린 집처럼 밖으로 나갈 길이 보이질 않았다.
“푹 삶은 브로콜리를 억지로 먹은 느낌이야.” 괴로운 듯 중얼거리는 이두나,
“똥 씹은 느낌?”
“아니, 더해…” 나는 말을 이었다.
“정말 얼굴에 하이킷을 날리고 싶어. 나, 이번 겨울에 비정규직 재계약 있잖아. 조짐이 좋지 않아… 내 나이가 얼만데. 스쿠터 타고 다니는 이십대도 아니고.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힘들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가 대책이 있을 거야. 주제와 방법론이 비슷하다고 다 표절은 아니야.”
“하지만 대책이 없어.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소란 말이야. 나 절대로 쫓겨나고 싶지 않다고.” 울고 싶었다.
태양계 행성이 붕괴되어 지구로 거칠게 돌진해오고 있는 느낌. 아직 당도하지 않은 먼 미래가 무서운 속도로 자기장으로 파고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이두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침착하려 애썼다. 마우스를 잡은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물을 한 잔 마셨다. 손에서 물컵이 미끄러졌다. 물이 쏟아졌다. 치마 바로 앞쪽이었다. 이두나는 황급하게 물기를 휴지로 닦아냈다.
소장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나를 함정에 빠뜨리는 일을. 휴지로 치마를 닦는데 눈에 불이 일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삶이 헛구역질 같았다. 토할 수도 없고 억눌러 삼킬 수도 없는… 지구의 항문에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세상이 더러웠다. 입안 가득 침이 올라왔다. 침을 뱉고 싶다. 치욕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좀처럼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이두나는 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A4용지를 와락 구겼다. 용지가 온몸을 찌그러뜨렸다. 이두나는 다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건형이었다.
이런 류의 치욕을 씻어주는 것은 역시 식욕 아니면 성욕이다. 이중에서 나는 성욕을 선택하기로 한다. 건형의 전화를 받자 내 안에 성욕이 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는 성욕이었다. 건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건형은 집 앞에서 1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감색 코르덴 재킷에 청바지. 지적인 신사처럼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옷차림이었다.
“뭐야, 이렇게 일찍 와 있었던 거야? 추운 데서?” 나는 놀란 듯 물었다. 감격을 애써 숨겼다. “너 본 지 한참 됐잖아. 너무 보고 싶어서…” 건형은 빨간 장미다발을 들고 있었다. 수염이 짧게 자라 있었다. 귀밑에 난 솜털이 보였다. 지적인데다 야성적이기까지. 완벽했다.
연구소에서 일을 생각하니 건형이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나는 마스카라가 잘 말려 올라간 눈썹을 크게 떠보았다.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생긋 웃었다.
“나 너무 추워. 어디 들어가자…” 건형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모텔에?” 내가 조용히 말했다.
“으응…?” 건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뭐, 뭐, 그래도 좋고…” 건형이 말을 더듬거렸다.
“꼭 모텔에 가야겠어?” 나는 투정 섞인 말로 되물었다.
“으응… 아니 모텔에 가도 되지만…” 건형이 다시 더듬거렸다.
“아니 네가 꼭 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애교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아니 안 가도…” 건형이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린 성의를 봐서 네 부탁 들어주기로 할게…”
“으…응? 정말? 모텔에 간다고?” 건형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이다.
순간 나는 지금 내 허리와 엉덩이를 둘러 감싸고 있는 헝겊조각에 대하여 생각하려 애를 썼다. 그 헝겊조각이 안전일 팬티인지 트렌드 팬티인지 알 수가 없었다. 특별한 날을 위해 입는 티 팬티나 망사팬티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오늘 내가 입은 것이 보풀이 인 안전일 팬티라면 그건 화장이나 몸단장을 하지 않은 채로 아침 식탁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꼴이다. 이렇게 예고 없이 만날 때를 위해 스페어 팬티 하나쯤은 갖고 다녀야 한다니까. 자동차에 스페어 타이어 하나씩 갖고 다니듯 말이다.
내 존재에 대한 위험성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하러 먼저 들어가 팬티를 재빨리 벗어버릴까… 건형이 같이 샤워를 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갑자기 머리가 어수선해졌다.
모텔은 금방 눈에 띠지 않았다. 뒷골목에 선술집과 노래방, 볼링장과 모텔들이 늘어서 있었다. <홀인원> <파인힐> <파라다이스> 모텔의 형광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서 번쩍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