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민진 선배님께,
선배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익명으로 메일을 드리게 된 점 양해해주세요. 저는 석사를 마치고 전기학회에 들어간 민진 선배의 학교 후배랍니다. 늘 평소 때 민진 선배님의 성품과 전기학계에서의 연구를 보며 존경해오고 있었어요.
이두나 선배님에 대하여 좀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민진 선배님이 두나 선배님과 친하게 지내고 또 민진 선배님이 두나 선배님을 그렇게 챙겨주시는 거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민진 선배가 없는 자리에서 두나 선배가 민진 선배 욕을 그렇게 해대더라고요. 잘난 체 하는 여우라나 뭐라나. 공주병이고 얌체라고. 참 기가 막혔어요. 되도록 이렇게 편지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사실도 모르고 민진 선배가 두나 선배를 두둔만 하는 모습을 보니 참 안타까웠어요.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 민진 선배님이 두나 선배님을 혈육보다 더 친한 자매처럼 보살펴주는데…
또 이두나 선배님 전기광학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사실 Q대학 K 선생 논문을 표절한 것입니다. 같은 주제와 같은 결론을 살짝 제목만 바꿔서 쓴 아주 야비한 논문이에요. 참 기가 막히지요. 표절의 증거는 두 논문을 비교해보시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민진 선배님을 존경하는데 선배님께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 죄송하네요. 사정상 메일 내용은 비밀로 해주세요.
편지는 충분히 공손하면서 다정했다. 발신자는 오빠나 언니에게 말하듯 친근한 구어체를 구사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어요?”나 “참 기가 막혔어요.” 따위는 발신자가 의도적으로 이십대 후반의 발랄함을 가장하려는 티가 역력했다. “~주세요.” “~에요.” 따위는 여성적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흉내 내고 있었다.
전기학과 후배들은 결코 코맹맹이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후배들은 오히려 깍듯하게 “~습니다.” 체를 쓰거나 오히려 중성적인 목소리를 낸다. 그게 전기학과 여학생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현수에게 온 익명의 메일도 거의 비슷한 방식이었다.
“내가 다시 답장을 했거든. 도대체 너 누구냐고… 그랬더니 글쎄, 없는 메일계정이라고 되돌아오더라… 메일 계정을 만들고 바로 지워버렸나 봐. 이년 아니면 이놈이…” 민진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두나 선배, 이대로 당하고 있을 거예요? 우리한테 이 정도라면 다른 연구원들한테 쫙 뿌렸을 텐데…” 그러고 현수는 사무실 전체를 쭉 눈으로 훑었다.
나는 볼펜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열었다 닫았다 했다. 눈이 이글이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십오 년 동안 독방에 갇힌 오대수처럼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 누구냐?”를 외치며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오대수처럼.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너 누구냐?”라고 묻기 전에 네가 누구인지 나는 알아버렸다. 위장으로 자신을 가려도 범인은 자신의 체취를 남기기 마련. CSI가 아니어도 그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 상대는 불행히도 범행 현장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건 바로 문장이었다.
1.4킬로그램의 뇌 속에 자신의 언어구조가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낸다. 문체는 손가락에 있는 지문과도 같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만은 명확하다. 이메일의 말투, 그건 주상도의 의도된 말투였다.
그는 내게도 익명의 메일을 보냈다. 그가 즐기는 협박용이었다.
나는 주 소장 집안을 잘 아는 사람이에요.
사모님은 이두나 씨 목소리가 계속 귀에 쟁쟁거려서
악몽과 환청 증상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요.(그러니까 내가 날 그만 따라다니라고 했잖아~)
이 책임이 당신에게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주 소장이 비겁하게 당신을 괴롭혔다고 했는데
메일 내용을 보니 당신을 천사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고
당신을 천지신명이 도울 것이라 했네요.
그런데 왜 비겁하게 괴롭힌다는 건가요.(지금 네가 이렇게 익명을 가장해서 보내는 이런 메일이 비겁하게 괴롭히는 거야~)
난 절대 뒤에 숨어만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숨지 않을 자가 이렇게 익명으로 메일하니?)
나도 K대 졸업한 사람이에요.
언젠가는 당신 앞에 나타나 당신의 잘못을 하나하나 따질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죠.
뭘 잘했다고 큰소리예요.
주상도는 메일을 쓰는 순간 여자 목소리를 내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잠깐 여자가 되는 야릇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스타킹에 치마를 입고 브래지어를 차고 가발을 착용한 채 “~할 수 있어요.” 따위의 코맹맹이 소리를 해대는… 여장남자처럼. 그는 세상이 얼마나 흥미로워 보였을까.
사실 남성들이 생각하는 만큼 여성들이 여성스러운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애교스러운 코맹맹이 소리는 남성들이 가공한 여성 판타지일 뿐. 나만 하더라도 애교는 무슨 애교. 그런 건 벌써 구워먹고 삶아먹은 지 오래다.
그러나 주상도는 범죄현장에 뜻하지 않게 본인의 지문을 남겨놓고 말았다. “뭘 잘했다고 큰소리에요.” 주상도가 툭하면 잘 쓰는 말이었다. 흥,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는 며느리 구박하는 뿔난 시어머니처럼 연구원들을 야단칠 때 이 문장을 애용했다.
주꾸미는 열심히 삽질을 계속했다. 이두나를 생매장시키려고 열심히 땅을 팠다. 이두나의 논문을 뒤져 험담거리나 표절 건을 찾았다. ‘이두나’를 매일 검색해 네이버로부터 이두나의 활동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두나 글이 실린 연재물에 악성댓글을 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연재물 사이트에 들락날락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