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세상에 어처구니없이 맞게 되는 일들이 간혹 있는 것이다. 시간을 딱딱 맞출 수 없어 황당해지는 일들 말이다. 똥이 나오려 하는 일이나 애가 나오려 하는 일. 그리고 죽는 일…
콜로 불러놓은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할아버지를 부축했다. 호통은 벼락같았지만 몸은 나뭇잎처럼 가벼웠다. 물기가 다 빠져나간 나뭇잎같이. 이미 몸에서 죄란 죄는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택시가 한강다리를 통과하고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성당에 도착했다. 작은할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테오 신부는 마침 사제관에서 성경을 읽고 있다. 평소답지 않은 지적인 태도. 아버지는 아기를 안듯 작은할아버지를 안아 휠체어에 내려놓았다. 작은 식구들과 함께 헐떡거리며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테오 신부는 사제관 책상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죽을 자를 위해 준비한 듯 검은 사제복 옆선이 줄이 세게 나 있었다. 위엄 있는 사제의 풍채였다. 죽어가는 노인은 테오를 보자 반가운 듯 가녀린 웃음을 띠었다. 뺨이 가늘게 떨렸지만 눈빛만은 맑게 빛났다.
“신부님, 신부님 꼭 뵈어야 될 것 같아서… 이곳에 데려다 달라 캤소.”
테오 신부는 대답했다.
“하느님은 어디든 계시는 분입니다. 굳이 여기까지 안 오셔도 됩니다. 고해성사를 하면 하느님은 죄를 다 사해주시는 분이니까요.”
그리곤 테오 신부는 나뭇잎처럼 작은, 작은할아버지의 휠체어를 끌고 커튼이 쳐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방에서 조그만 소리가 들렸다. 나직한 속삭임이었고 나직한 웃음 소리였다.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민화투를 치는 것도 같았다. 티브이 야구 중계나 닭요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돌아가시기는 힘들 것 같았다. 아버지와 작은집 식구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작은집 사촌 오빠가 사는 성북동 쪽으로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작은집 식구들은 작은할아버지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작은할머니에게 “이번 세상에선 어쩔 수 없이 같이 살았지만 다음 세상에선 절대로” 따위의 작별인사를 하면 어쩌려는지 어떤 준비도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면 광복동 오층 건물이나 과수원 사과밭에 대한 이야기 대신 “내가 아끼던 오동나무 바둑판은 손자 누구누구에게 주꾸마”라는 말을 하면 어쩌려고 하는지 도무지 대책 없는 얼굴이었다. 죽음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너그러운 것만은 아닌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돌아가자 사제관이 조용해졌다. 테오와 작은 할아버지, 내가 남았다.
오후 빛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왔다. 사제관 마룻바닥에 햇빛이 비쳤다. 나무 바닥 진향 향내가 났다.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사제관 앞 은행나무잎이 잘 익은 똥처럼 노랬다. 노인은 유리창 밖 잘 익은 햇빛과 바람을 바라보았다. 죽음 앞에서 서두르던 마지막 시간이 햇빛 속에서 나른한 낮잠이라도 자는 듯해 보였다. 노인은 평온해 보였다.
작은할아버지는 내가 빨리 죽지 않더라도 너무 화를 내지 마라, 라는 눈빛이었다. 나와 테오 신부를 보았다. 그러더니 서서히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햇빛에 감싸인 아이처럼. 마음속에 욕망과 의지와 영예와 고뇌를 다 물리친 사람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테오는 내게 말했다.
“가질 수가 없어요…” 내가 말했다.
“그대로 두는 법을 안다면 그대로 둬…”
“뭘요?”
“마음을…”
“…”
“물론 그 법이 쉽진 않겠지만…”
한참 침묵이 흘렀다. 사제관에 나무 괘종시계가 몇 번 시끄럽게 울었다.
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악한 것 같아요…”
“사람들은 악한 게 아니라 모두 약한 거야…”
“현실이 나의 진실을 조롱하는 것 같아요…”
“조롱하는 게 아니라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야.”
“왜?”
“진실은 사람을 위협하니까.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니까…”
“그럼… 난?”
“진실보다 너의 두려움과 분노가 문제야. 그 독소가 너를 패배하게 만들지도 몰라.”
“용서하라고요?”
“용서?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란 거, 너도 알잖아. 그건 하느님의 몫이야.”
“그럼, 우리에게 남겨준 몫은 뭐예요? 치욕을 견디는 거?”
“도망치지 않는 거겠지…”
“뭐로부터?”
“삶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