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오후 세미나는 전기 에너지 저장장치에 대한 건이었다.
“신
연구원은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 전기를 저장하는 코일을 가리켰다.
“일종의 전기 은행이라고 보면 되죠.”
전기를 저축해두었다 필요할 때 전력변환장치를 통해 외부로 공급하는 것.
사랑의 감정도 적절하게 저축해뒀다 필요한 양만큼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지나친 태풍이나 지나친 가뭄 같은 감정의 과잉이나 결핍은 없을 텐데… 나는 세미나실 테이블 위에 묻은 커피 얼룩을 티슈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얼룩이 일부 지워졌다. 나는 세미나실을 둘러봤다.
“우리 연구진이 개발한 초전도체 전기 저장장치는 1메가와트 규모로 천 개만 있으면 고리 원자력 발전소와 비슷한 용량입니다.”
세미나실에 앉아 있는 연구원들은 진지한 표정이다. 정면에 쏘고 있는 빔 프로젝터에 열중하고 있다. 이구선이 졸음 오는 눈으로 껌을 씹고 있다. 나는 몰래 티슈에 침을 뱉었다. 침으로 커피 얼룩을 마저 닦기 시작했다. 그리곤 좀 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두나 씨, 큰일 냈더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가정이 있는 집에 전화를 해서 사모님한테 그런 막말을 해… 두나 씨 공인이잖아. 공인이 그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해도 되는 거야? 그 집 이제 큰일 났더라고. 부인이 응급실에 실려가고 또 이혼하겠다 서류를 갖고 오고… 난리가 났어, 난리가.” 이대팔은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세미나가 있기 전 이대팔 과장은 나를 불렀다. 그 자리엔 손진영 과장도 있었다.
“과장님, 전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집 앞에서 매일 기다리고 야밤중에 집에까지 전화해서 소리 지르고…”
“아,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아봤어야지. 주상도 소장 집으로 전화해서 사모님한테 다 일러바치는 게 옳아?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자가 먼저 꼬리치지 않았는데 소장님처럼 대단한 인격자가 움직이겠어? 소장님이 어떤 분이야.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야. 교양 있는 신사라고. 어떻게 그런 분한테 이렇게 막 대할 수가 있어? 자네가?” 이대팔은 책상을 소리 나게 쳤다. 손진영 과장은 이대팔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기가 막혔다.
뭐랄까. 헤어숍에서 한참을 졸다가 잠에서 깼을 때 놀라움 같다고 할까. 조금만 커트해달라고 했는데 자는 사이 머리를 거의 다 밀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기대는 안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이대팔, 손진영 모두 주상도가 밥줄이니 당연하기도 했다. 그래도 손진영 과장한테는 주상도 일로 도움 요청까지 했었는데… 내가 받은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상도가 우리 집에 밤늦게 전화해 모욕적인 말을 한 이후 나는 내내 불면에 시달렸다. 그 부인과 통화한 후 모든 것에 예민해 있었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강박적인 두려움에 시달렸다. 질 나쁜 테이프처럼 자꾸 잠들이 끊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했던 말이 잘못된 것이었나 끝없이 반추하고 반성했다. 그것은 심한 부끄러움과 회한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전처럼 외로움이 찾아왔다. 억울한 자가 흔히 겪는 고독이었다.
시간들이 위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세미나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편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테이블 커피 얼룩을 더욱 세게 닦았다.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미나실에 있는 모두가 나를 ‘더러운 년’ 하는 것 같다.
논문마감이 바로 이틀 뒤다. 나는 한 글자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 있다. 스크린은 하얀 빛만 뿜어내고 있었다.
형두가 방에 들어왔다.
“뭐야… 방이…”
“뭐가…?” 심드렁하게 말하는 이두나,
하긴 그랬다. 도둑이 금붙이를 미친 듯이 찾다가 달아난 현장 같았다.
옷장 서랍이 열려 있고 선반 문은 열린 채 흔들거리고 있다. 치마와 재킷, 블라우스, 바지가 침대 위에 널려 있다. 책상 서랍 네 개 중 두 개는 열려 있고 책들이 바닥에 무너져 있다.
“관자놀이 위에 분화구가 생겼어.”
“자기 학대의 시작이야?”
“아니, 그렇다고 방을 학대한 건 아니야.”
“그럼 두통이야?”
“으응… 조직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이 너무 비싼 것 같아.”
“인터넷으로 그 작자 얼굴 찾아봤어. 내가 보기에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 오히려 신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데.”
“불행히도 단지 신사 같은 얼굴만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소리쳤다.
“그럼?” 형두가 물었다.
“실제로도 신사야. 바로 그게 문제지.”
“자기 부인이 내 전화 받고 위경련을 일으켰대. 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병원 응급실로 업고 가서 밤새 간호했다더군. 아주 극진하게 간호했대. 응급실 옆 침대에 만취돼서 누워 있던 놈팡이가 벌떡 일어날 만큼…”
“조금만 더 간호했으면 십년 누워 있던 식물인간이 벌떡 깨어났겠다.”
난 주상도 부인의 전화를 받고 지금까지도 불면증에서 헤어나질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이두나가 먼저 꼬리쳤다고… 오히려 당당해 하더래.”
“하긴 이두나의 교태도 만만찮지.” 형두가 이를 쑤시며 킬킬댔다.
“야, 지금 농담할 때 아니야.” 내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괴롭힘을 당했는데… 내가 스토커가 된 것 같아…”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자학하지는 마.” 형두가 코를 후벼 코딱지를 버리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상어고기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나는 코딱지를 싸도록 형두에게 티슈를 건네줬다.
“세상이 나한테 괴상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정말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이럴 수는 없어…”
“사랑 그 자체가 괴상한 은유야.” 코딱지를 티슈에 싸는 형두,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괴로움을 겪는지 잘 알아. 나도 애인한테 전화가 없으면 죽을 지경이라고. 근데 소장은 이게 뭐야. 사랑 운운하면서 사람을 급박하고 일을 뿐이야. 자신의 권력욕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
“문제는 소장이 너무 완벽한 신사라는 거야. 완벽하고 악랄한 신사.”
“내가 그 주꾸미 때려줄까?” 오버하듯 주먹을 휘두르는 형두,
“흥, 간지러워할 걸?”
그리고 나는 키득키득 슬프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