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야, 걱정 마. 주상도 그 부부 절대로 이혼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민진은 치즈버그를 한입 베어 물고는 말했다.
“아니야, 정말 이혼할지도 몰라. 그 부인이 단단히 화가 났단 말이야.”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 안은 이두나,
“어휴, 순진해 빠져서…”
“그럼 나 가정파괴범 되는 거 아냐?” 나는 곧 울 것처럼 말했다. 사실 그랬다. 주상도 부인이 이혼하겠다는 말을 한 후 나는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뭔가 심각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가정파괴범이 배꼽 잡고 웃을 소리 하고 있네… 만약 이혼한다면 그건 그 가정이 본래 문제가 있었던 거라고. 그 가정의 문제야. 네 잘못은 아니야. 그러니까 마조히스트처럼 자기 살 후벼 파지 마… 자기학대를 즐기고 싶다면 몰라도…”
“…” 한참 테이블 위의 버거를 바라보고 있는 이두나,
“그렇긴 한데, 그년 참, 소름끼치는 년이다. 너를 이혼한다는 말로 협박하다니…”
그러나 주상도의 부인은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절제 있게 행동하려 했다. 그녀는 자존심에 상처 입는 것을 경제적인 손실보다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낭비되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그 여자가 전화를 끊기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이두나 씨, 걱정하지 마요. 다들 이성적인 사람들이니까 잘 해결하겠지.” 조롱인지 위로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자는 차분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렇지…”
“네가 잘못하긴 뭘 잘못했다는 거야? 너 혹시 고통녀니?”
“고통녀가 뭔데?”
“남자친구에게 뺨 맞는 걸 즐기는 것처럼 피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대부분 여성들은 절대로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스스로 내면화된 고통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 상황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을 모두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고통과 폭력을 즐기는 사람은 없어. 순교자들밖엔.”
나는 민진에게 건너편 테이블에 있는 티슈를 달라고 했다. 테이블에 흘린 소스를 닦았다.
“난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나 자신의 실제 사이 간극이 늘 힘들어. 특히 남자들. 가만히 조용히 있으면 교만하거나 공주병이라 하고 쾌활하게 상냥하게 해주면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것으로 착각하더라.” 내가 말했다.
“Y염색체는 원래 그렇게 우둔해…” 민진이 말했다.
“사람들 다 마찬가지야.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칭찬을 해주면 아첨으로 오해받아. 오해를 지우기 위해 다른 말을 하다보면 늘 의도치 않게 더 큰 오해가 만들어져.” 우울하게 말하는 이두나,
“오해된 현실이 우리의 현실이잖아. 나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사람과 진실한 이야기를 나누기보단 그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곤 하지. 호의를 얻기 위해 때로 내 생각 따윈 필요도 없다 생각할 때도 있어… 왜냐하면 진실을 말해도 어차피 오해된 현실 속에서 살아가니까.”
“…” 입을 꽉 다무는 이두나,
“그러나 나 자신보다 상대를 즐겁게 해주는 것에 더 골몰하다보면 내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요는 네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좀더 냉정하게 자신의 의지에 충실했으면 좋겠어. 비굴함이나 비겁함에 익숙해져서 진짜 실크스타킹의 똥이 될지 몰라.” 민진이 말했다.
“실크스타킹의 똥? 너 그 뜻도 모른다 했잖아…” 민진을 바라보는 이두나,
“하여간… 혼자서 삽질 그만 하라는 거야…” 민진은 마지막으로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러곤 버거를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버거는 색색가지 야채와 소스로 멋있는 단층을 쌓아올렸다. 지층대 화석들처럼.
버거를 한참 내려다봤다. 민진을 따라 버거를 입에 넣었다. 크라제 버거는 너무 컸다.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입을 크게 벌린다. 한입 베어 문다. 허니머스터드 소스가 묻은 토마토와 양상추가 흘러내렸다. 버거를 내려놓고 나이프로 위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버거를 자르기 시작한다. 이번에 아보카도와 양파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먹을 수가 없네… 먹으란 거야, 구경하란 거야. 젠장… 이런 게 실크스타킹의 똥인가? 나는 빵은 빵대로 야채는 야채대로 소스는 소스대로 따로따로 먹기 시작했다.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생(生)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