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내가 이혼해줄 테니까… 주상도 그 인간이랑 잘해보라고…”
비엠더블유의 남자가 자기 차 뒤쪽 범퍼를 살폈다. 그러더니 내 쪽을 봤다. 영 인상이 구렸다.
“아니, 사모님, 이혼이라뇨…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혼할 테니 둘이 잘살라니까.” 그녀는 차분하고 정돈된 영혼으로 말했다.
“아니, 안 됩니다. 절대로. 이혼만은… 사모님, 다시 생각을…” 이두나는 고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야기 끝났어. 전화 끊을게. 이혼 수속 서류 준비할 테니 이제 너랑 더 할 이야기도 없어…”
비엠더블유가 인상을 쓰면서 천천히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 됩니다. 사모님, 절대로… 아니, 아니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소장님보다 제 잘못이 더 커요.”
이두나는 뭔가 그리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뭘, 잘못했다는 거지?” 여자는 침묵을 지키더니 그제야 차분해진 듯했다.
“아니ㅡ, 저 그게… 소장님은 잘못한 게 없다고요. 그러니 너그럽게 봐주세요. 절대 이혼 같은 거 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두나는 사정을 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갑자기 사정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인류의 평화를 위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급해진 이두나는 다음 멘트를 이었다.
“가정을 깨시면 안 됩니다. 아이들을 생각하셔야죠.”
이두나는 그 흔하고 상투적인 바짓가랑이, 죄 없는 아이들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졌다. 드라마 속 대사를 그대로 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랑과 전쟁>에서 김혜정이 한 말 같기도 하고 <사랑의 진실>에서 오영실이 한 말 같기도 했다. 그럼, 상대는, 아이들을 생각하는 인간이 딴 여자 만나 바람피우고 그러냐, 그러면서 자기감정에 복받쳐 울어야 했다.
“우리, 애, 없어. 그러니 애 핑계될 생각하지 마! 그리고 네가 뭐 잘못했다고 하는데… 잘못한 게 없나 보지? 여하간 이혼 수속 들어갈 테니 상관 말아. 이제 우리 가정 일이니까.”
그러고는 딸깍. 저쪽에서 전기를 끊었다. 내 귀로 송출되던 전자파가 뚝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비엠더블유가 내 차 운전석 옆 차창에 섰다. 그는 유리창을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고 콧방귀를 켰다.
야, 이 차 주제에 나의 애마 비엠더블유를 박아? 너 이제 죽었어. 범퍼 가는데 이 이백만 원은 나와…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실신 직전에 백마 탄 왕자까진 아니지만 인상 구린 비엠더블유라니… 운전석 유리창을 내리는데 아침 햇빛이 눈을 찔렀다. 단단한 햇빛이 밧줄처럼 목을 죄어왔다. 살인적인 햇빛이었다. 이런 날은 누군가를 죽여도 용서받을 수 있어. 충분히 햇빛이 날카로웠으니까.
“이봐. 차를 받았으면 좀 나와 봐야 하지 않아?” 그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스트라이프 줄이 쫙 서 있는 아르마니 양복이었다.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겐조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뒤에서 차들이 빵빵거렸다. 야, 네가 깜박이도 넣지 않고 들어왔잖아. 차 막히는데 함부로… 왜 들이대긴 들이대?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마구 나오려 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진실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지성적 도구가 아닌가. 그리곤 곧이어 슈퍼마켓에서 핸드백을 소매치기 당한 여자처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빵빵거리는 차들을 보면서 길가로 차를 대라고 했다. 재진약국이라 간판이 붙어 있는 붉은 보도블록 쪽이었다.
길가에 번개를 세우고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비엠더블유 쪽으로 갔다. 범퍼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멀쩡한 눈으로 눈을 껌벅거리고 있다. 양쪽 깜박이를…
뭐야, 멀쩡하네…
“저, 범퍼가…”
“그래… 범퍼를 박았지?” 그가 내 말을 잘라 먹었다.
“그런데… 범퍼가…”
“범퍼 전체를 갈려면 수리비가 꽤 나오는데…” 그는 다시 내 말을 잘라 씹어 먹었다.
“예?”
“아침 출근길이고… 서로 바쁘니까 그냥 가도록 하지… 다음부터 잘 보고 운전해… 알겠어?”
비엠더블유는 큰 인심을 썼다. 쓰는 척 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할 줄 모르겠다. 하지만 이때 가장 적합한 단어는 역시 이것이다. “(형님),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구십 도로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근데 저 자식 왜 반말이야? 처음부터… 나는 햇빛 속에서 빛나고 있는 형광 표지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