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나는 한참동안 형두를 바라봤다. 형두는 핏자국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뭔가 이글이글 울음이 타고 있었다. 나는 피범벅이 된 바닥을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내가 어떻게 해야만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라다 짝퉁 재킷을 벗었다. 치마를 벗었다. 스타킹을 벗었다. 렌즈를 뺐다. 귀고리와 시계를 풀었다. 아디다스 츄리닝을 입었다. 안경을 썼다.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주먹을 쥐었다. 방패를 들듯 수첩을 꺼냈다. 창을 꺼내 들듯 전화기를 들었다. 버튼을 하나씩 눌렀다. 신호가 갔다. 한참을 기다린다.
드디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밤 11시 30분.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
“저, 주상도 소장님 댁인가요?”
“그런데요.” 메마르고 단정한 대답.
“주상도 소장님 사모님 되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길고도 험난한 인생이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유턴을 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뻐꾸기시계가 울었다. 침대 옆 선반 위를 더듬었다. 탁상용 시계를 찾아 알람 꼭지를 눌렀다. 눈꺼풀이 눈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가 깨질듯 아프다. 잠을 더 자야 한다. 그런데 한번 깬 잠은 날아가 버렸다. 의식이 묘하게 눈을 뜬다. 몸은 자고 싶은데 의식은 깨어 있었다. 눈뜨고 죽은 시체처럼 피곤했다.
정확하게 아침 9시. 그 어긋남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각에 나의 애마, 번개를 타고 있었다. 번개는 남부순환도로를 통과 중이었다. 차들은 교통방송을 들으면서 천천히 기어갔다. 이대로라면 최악이다. 연구소까지 뛰어서 가는 게 더 나을 지경이다. 경부고속도로 지하를 통과하느라 차들이 진땀을 흘려댔다. 교통방송 리포터는 오늘따라 더 명랑한 목소리를 내며 운전자들을 약 올렸다. 오늘의 날씨를 말씀드…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여보세요…” 주상도의 부인이었다.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
어제 전화에서 격앙됐던 목소리는 분명 아니다. 하룻밤 새에 어떤 여유를 갖게 된 걸까. 분노를 겸비한 여유 말이다. 그녀를 분노에 빠뜨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내 삶에 대한 ‘변명’ 하나 정도가 내겐 필요했다.
뻑뻑하게 조여 오는 삶의 압박에서 아주 조금 숨을 쉴 수 있는 통로… 주상도의 부인이라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잘 살피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라면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남편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다.
“어젠 제가 너무 흥분하고 놀랐어요. 두나 씨 전화를 받고… 그런데 남편과 이야기를 해보니 영 다른 이야기더군요. 남편 말로는 두나 씨가 다른 연구소에 원서 내는 데 도와달라고 하면서 자꾸 만나자 했다면서요… 두나 씨가 오히려 제 남편을 승진이나 취직을 위해 이용한 거 아닌가요?” 매끄럽고 잘 다듬어진 목소리였다.
“네?”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이두나.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감기약을 먹은 듯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저, 저, 아닙니다. 그건 사실이… 소장님이 제게 얼마나 전화를 하고 이메일을 보냈는지 증거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렇게 두나 씨를 괴롭혔는데 왜 두나 씨는 그 사람을 계속 만나준 건가요?”
옆에 가던 비엠더블유가 깜박이도 없이 내 차 앞으로 끼어들려 했다. 나는 앞으로 차를 더 바짝 붙이기 위해 속도를 냈다.
“소장님 마음을 돌려보려고요. 그렇게 훌륭한 분이 여자문제로 명예가 실추되면 안 되니까. 또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서로 원수지간이 될 수도 없고… 그런데 소장님이 자꾸만 자신은 외로운 사람이라고…”
그 순간 나는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번개가 비명을 지르며 멈췄다. 비엠더블유 옆구리 끝부분 뒤쪽 범퍼를 살짝 받은 것이다.
“뭐, 외롭다고? 그이가 그런 말을 했어? 외롭다고…?”
여자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주상도의 외로움을 왜 네가 책임져? 넌 그렇게 할 일이 없니? 아니면 천사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위선자니?”
“아니, 그게 아니라…”
벽장 안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발견한 듯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앞에 끼어들던 쥐색 비엠더블유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리는 게 보였다.
“너도 그 작자의 감정을 즐기고 있었잖아. 더군다나 대단히 위대하신 소장이니까. 꼬리를 쳐서 어떻게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잖아.” 순간, 가슴에 지직―하고 전류가 흘렀다.
“주상도도 너한테 몇 번 전화하고 만나자 한 거 인정하더군. 그러니까 둘이 좋아한 거 같은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목소리가 허공에서 딱 고등어 반 토막으로 갈라졌다.
“서로 둘이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
“아니, 뭘?” 목소리를 가늘게 떠는 이두나,
“둘이 같이 살면 되겠네. 내가 물러나줄 테니까…”
여자가 악을 쓰고 있었다. 심장이 딱 막히는 이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