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연구소 쪽 워낙 보수적이잖아. 이런 소문 치명적인데… 곧 인사도 있고… 우리 같은 계약직 언제 목 잘릴지 모르는데…”
민진은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진심어린 염려였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정규직, 이래서 서럽다는 거야. 불안한 땅 위에 서 있는 거니까. 소문 한번 잘못 터지면 용서가 없는 법이거든.” 민진은 조직의 똘마니처럼 비참하게 말했다.
“…” 컴퓨터 자판 위에 있던 손이 한정 없이 떨렸다. 가슴 끝이 팽팽하게 아려왔다.
민진은 그래도 위로라는 걸 해야겠단 생각을 한 것 같다.
“비정규직이란 게 꼭 죽도록 일만 하는 개미 같아. 개미들은 알에서 깨어날 미래의 자손들을 위해 열심히 음식물과 주거 공간을 준비하잖아. 정말 노력하는 근면한 자들이지. 그 자손들이 영양분을 다 먹어치우고 번데기 단계가 되면 이번엔 그들이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똑같은 일을 시작해. 이렇게 순환을 계속해서 개미들이 무엇을 얻게 되는지 모르겠어. 허기와 성적 열정을 만족시키는 것 외에 달리 아무것도 없잖아. 약간의 덧없는 만족감 같은 거?”
갑자기 불운한 개미가 된 것처럼 슬퍼졌다. 무의미한 순환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진아, 어떡하지? 주상도가 드디어 일을 낸 것 같네… 주상도가 어젯밤에 건형이랑 내가 같이 있는 걸 봤거든… 그래서 주상도가 이대팔에게 말하고 이대팔이 이구선에게 말하고 이구선이 맹아부에게 말하고 맹아부가 고상과 도도에게 말하고 고상과 도도가 다른 연구원들에게 다 말한 것 같아…”
“무슨 족보가 그렇게 길어? 난 손진영 과장한테 들었는데?”
“응? 손진영 과장? 하여간… 소문 다 돌았구나… 나 어떻게…”
“어떻하긴… 기다려봐야지. 뭐, 실제로 건형이랑 동거하는 것도 아닌데 뭘…” 민진이 죽어가는 환자의 손을 잡듯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팬티를 입지 않고 팬티스타킹을 입은 것 같아. 아래로 바람이 다 들어오는 느낌이야. 내 삶의 전체가 다 흔들리는 것 같은… 이런 게 비정규직인가 봐… 조그만 소문에도 삐걱거리고…”
뭔가 거대한 해일이 나를 삼키려 밀어닥치는 느낌이 들었다. 휴게실 유리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을 나뭇잎들이 노랗게 변하고 있다. 노란 혀들이 발랑거리며 몸을 떨었다.
“나 잘리면 형두가 집 나가라고 할 텐데… 그 작자, 생활비 못 내면 나가라고 구박할 게 뻔해… 나 서울에서 갈 데도 없단 말이야…”
눈물이 핑 돌았다. 콧날이 시큰해왔다.
“난 어떻고… 나 우리 집 소녀 가장이잖아.”
민진이 힘없이 말했다.
“너 소녀 가장이라고 하긴 한참 지난 거 아니니?”
나는 콧물을 훔치며 물었다.
“야, 지금 그런 거 따지게 생겼니?”
민진은 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곧 겨울인데… 그럼 애인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도 못 사주겠지?”
민진과 나는 실제로 해고라도 당한 듯 벌써 눈물이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때 눈이 와도 키스도 못할 거구…”
두 실직자는 서로 얼싸안고 울 수밖에 없었다.
“두나야. 이거, 너한테 온 것 같은데….”
한나 언니였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우편함에서 찾아온 편지 봉투였다.
“뭔가 묵직한데 봉투가 말이야…”
봉투 안이 비닐 팩으로 감싸인 각대 봉투였다. 마음이 급해 나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봉투 입구 틈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옆으로 미끄러뜨렸다. 그 순간, 뭔가 손가락 끝이 따뜻해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봉투 아래로 뭔가 흘렀다. 새빨간 피였다.
“아!”
핏물이 노트북 키보드 위로 흘렀다. 누군가의 새빨갛게 타오르는 증오가 내 온몸을 덧칠하는 것 같았다. 오른손 검지를 눈앞에 들어 올렸다. 깊게 베인 봉투의 빨간 틈새에서 블루베리 열매 같은 짙붉은 핏방울이 하염없이 굴러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둔탁한 살덩어리가 굴러 나왔다. 피 비린내가 났다.
잘려진 닭 모가지였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피가 묻은 오른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나 언니가 비명을 질렀다. 한나 언니가 새하얗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형두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안에 있는 모든 전구들이 스파이크를 일으키며 터지는 것 같다. 빨간 핏물이 흰 손톱 사이로 새어들었다. 나는 핏물을 사발에 받치듯 손바닥 가득 들고 서 있었다.
뭐야, 나를 닭 모가지처럼 자르겠다는 거야? 핏물 같은 공포와 분노가 몰려들었다. 연구소에 더러운 소문을 내더니 이제 아예 이런 식으로 나를 협박하려 드는군.
불쌍한 소시민의 연약한 두뇌 속에 엄청난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이젠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