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죽이다
1회
0.
신부님, 저는 은행을 털 만큼 대범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그렇게 소심한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날 괴롭히는 상사쯤은 납치를 해서 꽁꽁 묶어둘 수도 있다고요. 그의 입안에 38구경 총구를 들이밀기까지는 못하겠지만요. 그래도 쓰다 남은 전선을 뭉쳐 구겨 넣을 수는 있어요.
폭풍우가 치고 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난 그놈 입안 전선에다 전극을 연결해 전기를 흘려보낼 겁니다. 그러면 그는 프랑켄슈타인이 되겠죠? 그놈 몸이 번쩍 번쩍거리면 빙글빙글 돌겠죠. 밤 놀이기구처럼 말입니다.
신부님, 그럼 예수님이 한심해 하시려나?
니들 뭐하니? 하고.
1.
다음날 아침에 연구소로 가는 길은 왠지 상쾌했다. 콧노래가 나왔다. 주상도가 어제 건형이를 봤으니 이젠 체념이란 인류 역사 이래 가장 오래된 교훈을 얻었겠지?
어~야 디~야 뱃사공처럼 신나게 노를 젓듯 핸들을 꺾었다. 4차선 도로 코너를 돌았다. 연구소 정문으로 쏜살같이 들어와 애마 번개를 주차장에 세웠다. 차를 주차하고 눈을 드는 순간, 이두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주차장 앞에 주상도가 서 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주상도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무엇일까.
네 남친과 헤어져.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 볼걸? 아님,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내 감정도 좀 존중해줘야 하는 거 아냐? 아님, 이젠, 더 이상 너 따라다니지 않을게, 끝장이야. 어느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성가신 상대를 떨쳐내는 데에는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를 칼로 찌른 뒤에도 벽에 튄 핏물을 꼼꼼히 닦아 내야 하는 과정 따위 말이다.
사무실로 들어섰다. 후배 연구원들이 뭔가 수군거리다 내 쪽을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고상과 도도도 복도에서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말없이 지나갔다. 응? 승진 발표라도 난 것일까. 설마 내가 정규직 승진이 된 건 아닐 텐데? 아니면 재계약에서 해고된 건가?
“두나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민진이 달려들었다.
“응, 뭐?”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지금 연구소에 소문 좍 깔렸는데…”
“이번 정규직 승진 벌써 발표라도 난 거야? 아님, 누가 결혼이라도 한대 아님 별거 아님 이혼, 아님 누가 유부남과 동거라도 한대?”
“응, 맞아.”
“응? 뭐가 맞아? 승진? 결혼? 이혼? 별거? 아님 동거?”
“동거…”
“으응? 누가, 누가?”
나는 재미있는 흥밋거리라도 발견한 것처럼 히히 웃었다. 민진의 얼굴을 핥아먹을 듯 다가갔다.
“너!” 민진은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뭐? 무슨 말이야…”
나는 숨을 헐떡이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연구소 연구원들 사이에 소문 다 돌았어. 우리 연구소 이런 소문 총알보다 빠른 거 알지? 백분의 일 초 안에 다 퍼져.”
“거의 전자파의 속도겠다. 전자파가 천 분의 일 초에 298킬로미터 날아가니까.”
“농담할 때가 아니야.” 민진은 진지했다. 연구소 안에 수많은 전하들이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298킬로미터라면 무한할 정도로 거대한 파동이다.
“아니, 내가 무슨 유부남과 동거한다는 거야? 말도 안돼… 요통광고에 나오면 딱 맞는 허리 아픈 형부에다 코 후비기 취미인 언니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그러게… 그런데 정말 너 동거하는 거 아니지?” 민진이 숨을 죽이고 물었다.
“아니, 누구랑? 누구랑 해야 한다는 거야? 동거를…” 너무 큰 소리를 냈는지 휴게실 다른 직원들이 이쪽을 봤다.
“건형이랑 말이야…”
“건형이… 건형이가 왜? 건형이랑 사귀고는 있지…”
“너, 아직 모르는구나. 건형이 별거 중일 거야. 아직 서류 정리 안 했을 걸…”
“…” 나는 놀란 눈으로 민진을 바라봤다.
“나도 얼마 전에 들었어. 이혼한다 한다 했는데… 여자 쪽에서 계속 버티나봐… 건형이는 빨리 정리하려는 것 같은데….”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자다가 봉창 두들기다 오밤중에 누룽지 긁어먹다 마당에서 피티 체조하는 소리냐 말이다. 관자놀이에 누군가 모르스 부호를 타전하는 듯했다. 머리가 아팠다.
이런 따위의 소문을 낼 사람이 누군지는 분명했다. 끔찍했다. 발정난 주꾸미는 집으로 돌아가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고양이를 삼킨 듯 밤새 내내 뒤척였을 것이다.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책상에 앉았을 것이다. 인터넷을 뒤졌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력을 동원해서.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건형이가 이혼 직전이라는 것(물론 그건 사실이다), 아파트로 건형과 내가 같이 들어가는 것이 동거의 증거라는 것. 비틀어서 소문을 내는 방식 또한 탁월했다. 정보수집 능력, 정보전달 속도, 왜곡방식 모두 발정의 속도만큼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