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회
나는 발끈 화가 났다.
“소장님, 아직도 모르겠어요? 소장님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부하 직원한테 이러면 안 되죠. 손가락 사건은 미안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소장님은 절 성폭행하려 했습니다. 명백하게… 이런 건 고소 건이죠.” 따지듯 말하는 이두나,
“그래서 날 고소하겠다? 날 협박하겠다? 난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어.” 소장은 세련된 미소를 악마처럼 지었다.
“그러나… 계속 저를 이렇게 괴롭힌다면…” 나는 기어들어가는 말로 간신히 힘주어 말했다.
“아, 물론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는 거 너도 잘 알 텐데. 너도 나에게 상해를 입혔어.”
“…”
“우린 비겼어. 너도 알잖아?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다는 거.”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 네가 날 닮았기 때문이야. 자존심 세고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려는 생존력, 그런 게 맘에 들어. 너 스스로가 내 앞에서 옷을 벗을 날이 올 거야. 곧.”
그리고 주상도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나는 얼굴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고통이 비정하게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그때였다. 건형의 문자였다. 어디야? 으응, 연구소야, 아직 일이 덜 끝나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좀 이따 집에 가려고. 또 거짓말… 응. 알았어. 연락할게. 건형은 그렇게 문자를 찍고 (^^) 이모티콘을 보내며 웃었다. 울고 싶었다.
주상도는 아파트까지 나를 쫓아왔다.
“잠깐만 이야기해.” 주상도가 거칠게 내 팔을 잡았다.
“할 이야기 없어요.” 나는 매정하게 말했다.
“그래, 좋아. 한 가지만 말할게. 나 침대에서 잘하는 편이야. 너 남자친구 있어도 절대로 하지는 마! 약속하면 나 돌아갈게.”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상도를 쳐다봤다.
남자들이란 다 마찬가지다. 과대망상 말이다. 세련된 남자든 그렇지 않은 남자든. 성기에 ‘다마’를 박고 12.5센티 길이로 수술을 하면 모든 여자들이 ‘뻑 갈거’라고 생각하는 거. “우람한 남성의 상징, 밤의 황제로 만들어드립니다” 광고카피를 내걸고 비뇨기과가 성업 중인 걸 보면 알 만하다.
그러나 그건 심각한 착각이다. 여성들은 훨씬 섬세한 감성을 원하는데… 남성들 중엔 여전히 성기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바보들이 많다.
주상도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두나야.”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봤다. 놀랐다. 맙소사, 건형이었다.
“어떻게 여기… 왔어?”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타이트한 스커트 옆선을 움켜줬다.
“으응, 네가 집으로 간다기에… 아파트에 와 있었어. 저 남자는 누구야?” 건형은 내 옆에 있는 주상도를 힐끔거렸다.
“아아, 소개해야겠네. 이쪽은 우리 연구소 주상도 소장님이셔.” 나는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저, 이쪽은 제 남자친구예요.” 주상도가 눈을 번뜩였다.
나는 보란 듯이 건형이와 팔짱을 꼈다. 주상도의 얼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핏기가 없어졌다.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나는 주상도에게 인사를 하고 아파트 쪽으로 걸어갔다.
상대방을 떠나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더욱이 성가신 존재는.
어떤 경우엔 삶의 사적인 부분들을 보여주는 것이 유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체 특정 부위의 장애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습관 따위 말이다. 한나 언니가 자주 하는 일 중에 하나. 일테면 코딱지를 심하게 후빈다거나 후빈 코딱지를 모아둔다거나 모아둔 코딱지를 공으로 동글동글 말아서 방바닥으로 튕긴다거나 말아둔 코딱지를 모았다 먹어버린다거나 하는 괴상한 취미들 말이다. 죄수복 실내복에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뿔테 안경을 쓰고 팬티 가운데 부분이 닿아서 투명해져 있는 안전일 팬티를 입고 있는 따위 말이다. 게을러서 방은 언제나 지저분하고 합리적인 성격이라 라면은 냄비째 먹고 좋아하는 음식인 닭발, 족발, 닭 연골을 뼈째 오도독 오도독 씹고 있다면 주상도는 나를 선사시대 화덕에서 사냥감을 씹어먹고 있는 원시 고대인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족발을 다 뜯어먹고 뼈를 머리 위로 흔들어대며 포복감에 환호성을 지르면 그는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 본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를 집에 들일 수도 없는 일이다.
대신 건형이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젠 소장도 포기란 걸 배웠겠지.
아파트 현관에 건형이를 잠시 세워두었다. 내 방으로 먼저 달려갔다. 방을 치웠다. 건형이 아파트 거실로 들어올 때쯤 아파트는 잘 정리되고 세련된 원룸처럼 변해 있었다. 지저분한 옷가지는 침대 밑으로, 먹던 음식물은 냉장고나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