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
정념은 병보다 견디기 힘들다.
“한민진, 나 주상도 소장에게 당하고 있어.”
민진에게 주상도가 거의 매일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눈을 크게 뜨고 듣고 있었다. 민진도 조용한 봄날에 뭔가 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떡하면 좋지?”
하지만 어떤 묘책도 떠오르지 않는 눈빛이었다. 내 말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그녀는 마치 여흥구를 넣듯 “그것 참 별일이네”라고 대꾸했다. 나는 더욱 오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발신자 번호 확인하고 상대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른 이의 휴대폰까지 빌려서 전화한다니까.”
“그것 참 별일이네.”
“하루에 스무 통이 넘을 때도 있어.”
“그것 참 별일이네.”
“나중에 다른 이의 휴대폰 전화도 받지 않으니까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더라.”
“그것 참 별일이네.”
“요즘 거리에 아직도 공중전화가 있긴 있나 봐.”
“그것 참 별일이네.”
그러면서도 민진은 그렇게 고매한 인격자에다 실력자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이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
“정말 주꾸미 같은 놈이야” 내가 말했다.
“그러게…” 민진이 말했다.
“전기충격기로 주꾸미를 잡아버릴까”
“그러게…”
민진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주꾸미불고기를 만들어 먹을까보다.”
“좋은 생각이야.”
민진은 그렇게 주꾸미불고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저번에 구내식당에서 네가 소장 식판을 반납구에 갖다 준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소장한테 네가 장문의 메일을 썼다면서?”
“소장하고 와인바에서 데이트한 건 뭔데?”
민진이 속사포 같은 질문을 해댈 것도 같았다. 하지만 민진은 묘한 미소만 띠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민진이 그렇게 내게 빈정대도 할 말은 없었다.
그렇다고 주상도가 내 입술을 짓누르며 자기 혀를 내 입속으로 넣었다거나 허벅지 사이로 손을 강제로 집어넣었다거나 하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물어뜯은 일도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나를 다시 모욕하는 일이었다.
비밀이란 밝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비밀을 끝까지 간직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건 또 다른 공포와의 대면 때문이다. 사실 친구란 모름지기 비밀을 공유할 정도의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비밀을 공유하고 나면 영 다른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건 마치 허기에 지친 여행자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일단 배를 채우고 나서는, 야채는 너무 익히고 고기는 너무 짠데다 식당 테이블과 그릇들이 지저분하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과연 비밀을 듣고 난 다음에도 민진은 나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까.
큰 저택 집안사람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리는 도둑처럼, 나는 내 몸을 숨긴 채 내 안의 의식을 살폈다.
내 몸이 미로이듯 의식도 미로였다. 도처가 어둠이었고 도처가 사각지대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가지 일을 해야 했다. 건형을 만나고 싶다는 것과 주상도 소장을 잘 달래야겠다는 것.
최소한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때를 흙탕물 가득한 웅덩이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집안 배선을 손보는 예민한 문제일 수 있다. 벽에 고정된 전화기 나사 두 개가 덜렁거릴 때 나사를 조이면 된다. 이건 어쩌면 기술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테크닉, 나는 기술을 발휘해보기로 했다.
“소장님은 섬세하고 상냥한 신사세요. 그래서 연구소 사람들이 다 좋아하나 봐요.”
섬세하고 상냥하긴. 오만한 권력자에 불과하지.
“소장님은 한국 과학계의 미래잖아요. 저 같은 사람 때문에 괜히 오해받을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정 이러시면 사모님께 전화라도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상도 소장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내한테 전화하는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그럼 저한테 연락 안 하시면 되잖아요?”
주상도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로 오면 네 앞길은 탄탄해. 그런데 아직도 바동대는 거야? 교태가 심하군. 어리석은 거야, 교활한 거야?”
“소장님, 진심입니다. 저를 그냥 내버려…”
“내 손가락까지 물어뜯고… 이건 너무 심하지.”
“아, 그건…”
“너도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 아니, 넌 벌써 나를 좋아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