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회
“그래요. 집에 가서 편히 주무시구랴. 여기서 힘들게 이러지 말고…” 엄마의 갑상선에서 쉰 목소리가 또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그래도, 내가 있어야… 네 엄마한테…” 그랬지만 나는 아버지가 입고 갈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병원 일층 현관까지 내려왔다. 야간 택시가 두 대 서 있었다. 아버지는 씩씩하게 택시에 올랐다.
하긴 아버지의 혈통은 모두 건강한 신체를 자랑하고 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증조할아버지는 은행 회계원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 자신조차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 몰랐다. 어깨에 짊어진 세월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한 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돌아가셨다. 정확하게 증조할아버지의 나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가 택시를 타고 가는 뒷모습을 봤다. 한참동안. 나는 택시 승강장 옆에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쓰레기통 옆에 버려져 있던 빈 깡통 세 개가 시끄럽게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버지가 택시에 오르기 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상도란 사람이 누구냐? 너랑 무슨 관계니? 네 엄마 병원비를 내주고 갔더라. 아니, 아버지, 병원비를 받으면 어떻게요?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버지는 낸들 어떻게 하냐? 원무과에 그냥 내고 갔다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주상도가 엄마 수술하는 일까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두렵게 했다. 그물 속의 두 마리 게처럼 어쩌면 그와 화해할 수도 싸울 수도 없는 미궁에 빠진 느낌이었다. 끈끈한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지독한 꿈이라면 나는 그 지독한 꿈속으로 자꾸만 빠져들고 있었다.
밤, 병원 앞 어둠 속 가로등빛이 비쳤다. 불빛은 어둠 속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진흙 같은 바람이 불었다. 나는 아주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통화가 스무 통이나 와 있었다. 모두 주상도 소장이었다.
손가락이 다 나은 거군. 집 앞에서 또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건 내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의 속임수다. 삶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문자였다.
[두나, 옛날 일은 다 잊기로 하지. 용서해줄게. 넌 내 여자니까.]
공포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빈 깡통을 발로 찼다. 깡통이 깨갱깽거리며 나뒹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두려웠다. 주상도가 나를 또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계속 어두운 뒤쪽을 돌아봤다. 가슴이 정신없이 뛰었다.
주상도는 다시 게임을 시작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