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회
민진이 식당 문을 나오면서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쳤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내렸다. 구내식당 안에 있던 연구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소장은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무력감이 회오리처럼 온몸을 휘저었다. 삼풍백화점에 깔리며 죽는 시체가 된 느낌이었다.
계약직 재계약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성광학 연구소 공채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투서가 남발하고 유언비어가 난무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바엔 누군가가 되는 것도 방해하려 들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무례하고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흠잡을 것이다.
시기가 좋지 않다.
소장이 손가락 사건을 조용히 용서해주길 바랄 뿐. 스캔들 따위가 터지는 경우는 최악이다. 추문은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댈 게 뻔하다. 특히 여자에게 가혹하게. 숨이 막혀왔다. 사방에 길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 일이 없이 몇 주가 흘렀다.
머리 위로 흐르는 고요가 더 무서웠다.
“두나야, 두나야,”
“…으응…”
“야, 왜 이불을 꽁꽁 묶고 자고 있어? 답답하지 않아?” 형두였다.
극세사 요를 온몸에 감고 있었다. 목이 조여 왔다.
“야~ 이두나,” 다시 형두가 나를 깨웠다.
“너, 오늘 병원 가봐야 하잖아…”
“뭐, 무…슨…일로…" 졸음을 참지 못한 목소리가 목구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나가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니까 바톤 터치해. 오늘 장모님 수술하신 날이야…”
정말 그랬다. 엄마가 지방에서 올라와 수술한 날이 오늘이었다. 연구소 일 때문에 날밤을 샜다. 주상도 소장 일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던 탓이다.
정말 엄마 수술 날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 쇠 덩어리를 드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다. 아디다스 파랑색 츄리닝을 벗고 외출용 바지를 입고 거울을 봤다. 판다곰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 주변에 마스카라와 아이라이너가 온통 번져 있었다. 며칠 굶은 판다였다.
이두나, 화장도 안 지우고 잠들 정도니? 참혹했다. 연구소 일 때문에 며칠 야근하다 정말 판다가 될 지경이다. 욕실로 갔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밤이 되면 병원은 음산한 기운을 뿜어낸다. 죽음과 병균이 활개를 치는 때가 된 것이다. 낮에 풍겼던 소독약은 단순히 위장에 불과하였다는 듯이…
음산했다. 대학 병원 6층 입원실… 복도 천장 불빛과 비상등이 군데군데 켜져 있다. 복도 전체가 조용했다. 목숨에 대한 치열한 투쟁도 잠시 잠들어 있다.
나는 길고 어두침침한 복도를 걸었다. 운동화 고무바킹이 바닥을 짚는 발걸음 소리만이 선명했다. 간호사 하나가 간이 불을 켜놓고 엎드려 자고 있다. 푸른색 반팔 면상의를 입은 채였다. 간호사 데스크를 지났다. 병실 호실을 하나하나 살폈다. 엄마 이름이 적힌 호실 앞에 섰다. 문자로 적혀 있는 엄마 이름. 문득 낯설었다. 서금순… 엄마도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였다. 가슴이 먹먹해왔다.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은 어둠 속에서 깜깜했다.
순간이었다. 침대 위를 보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너무 갑작스런 일이었다. 나는 병실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야간 담당 간호사가 자고 있는 데스크 쪽이었다. 놀라서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간호사, 간호사,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자고 있는 간호사를 흔들어 깨웠다. 간호사는 잠에 겨운 눈을 겨운 뜬 채 나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엄마 침대에 웬 남자가 누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