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회
최악이다. 생이.
온 몸의 힘을 모아 그를 밀어내려 했다.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전류였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몸과 몸이 서로 충돌하듯 엉켰다. 저항이 있었고 울부짖음이 있었고 비명이 있었다.
“아악~” 주상도가 비명을 질렀다. 밤중 한강변에 서 있던 오피러스의 문이 덜컹 열렸다. 여자가 황급하게 차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여자는 프랑켄슈타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여자는 피를 즐기는 식인귀처럼 보였다. 여자의 입가에 흠뻑 피가 묻어 있었다. 여자는 불빛 앞으로 오자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쓰윽 닦았다. 눈가에 눈물을 닦았다. 여자는 스스로의 행동에 약간은 얼이 빠진 듯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주상도가 여자의 얼굴을 잡으며 덮쳐왔던가. 여자는 겁에 질려 엉겁결에 남자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손가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의 손가락이 여자의 입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듯 빠져나왔다. 새끼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찢어진 듯 덜렁거렸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보고 놀란다. 차에서 도망친다.
이두나, 지금 넌 어떤 선택을 한 거지?
내 인생은 끝났다. 비정규직의 삶, 조차도.
나는 에이스 침대 위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상처받은 고양이처럼. 그는 내 몸을 노리다 당했다. 내 몸이라 봐야 기껏 저당 잡힌 몸에 불과했다. 계약기간 만료 전까지 수임으로 겨우겨우 버텨내는 하청업자. 유통기한이 정해진 통조림.
소장은 나를 그냥 둘리가 없다. 유통기한 지난 상품으로 폐기처분할 게 뻔했다.
앞으로 어쩐다? 앞날이 막막했다.
언젠가 여름밤에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수은등 불빛 안에 수많은 밤벌레들이 소란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것은 삶의 광기인지 광기의 삶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했다. 밤벌레들은 삶을 사랑했다. 미치도록.
수은등 불빛 바깥은 어둠이 빽빽했다. 나는 그 빽빽한 어둠으로 밀려나지 않으려 했다. 불빛으로 날아드는 밤벌레처럼 버둥댔다. 그러나 삶은 마음처럼 잡히지 않았다. 물에 빠져 버둥댈수록 멀어지는 고무튜브처럼.
석사과정에 들어가서 조교가 됐다. 조교가 되기 위해 나는 순수하게 단정했다. 단정한 단발을 해가지고 다녔다. 옷은 검정 회색 감색 흰색이 다였다. 금욕적인 수도승처럼, 온순한 미소를 준비하고 다녔다. 교수의 눈치를 살피고 순발력과 성실을 발휘했다. 선후배 모임에서 미소를 띤 채 침묵을 선택했다. 침묵과 겸양은 최고의 위선 중에 하나였으니까.
연구소에 들어갔다. 그쪽 사람들은 좀더 가학적이었다. 마음대로 음모와 추문을 만들고 즐겼다. 추문은 마음껏 부풀려지다 사라졌다. 추문의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나 슬픔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연구소 경쟁자들은 내가 더 별 볼일 없고 더 가치 없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보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그들의 선심을 사기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을 듯했다. 처음부터 내 감정보다 남의 감정이 더 중요했다. 나의 선택보다 남의 선택이 더 중요했다. 사람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나의 진심 따윈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미치도록 삶을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삶을 피로 물들이길 원했다. 그것을 열정이나 호기심 혹은 상처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삶은 나를 구제하지 않았다. 9회말 2아웃. 서른 다섯 살을 바라보는 비정규직 싱글녀. 삶은,
허무가 바로 지혜란 것을 일깨우는 것 같았다.
절망이었다.
연구소에 갔다. 식당에서 마주친 소장은 손가락을 붕대로 감고 있었다. 그는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묵묵히 밥을 먹고 있다. 나는 식판을 들고 그와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로 갔다.
“너, 뭐야?” 밥을 씹으며 말하는 민진,
“왜 자꾸 소장을 힐끔거려…” 말을 잇는 민진,
“아, 아, 아니야. 그냥…” 주상도를 보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는 이두나,
이두나는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 먹고 나오면서 다시 주상도 쪽을 봤다. 붕대를 감은 새끼손가락이 커다랗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