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
“소장님이 아직 저를 모르셔서 그래요. 저는 생각만큼 그렇게 매력적이지도 조신하지도 않습니다. 저보다 훨씬 멋지고 세련된 여성은 많고도 많아요.”
나는 집에서 보풀이 인 파란색 츄리닝에다 오징어 다리를 질겅거리며 씹고 있는 이두나를 떠올렸다. 무엇보다 나는 소장이 가진 자기 욕망의 정체를 일깨우고 싶었다.
인간이 욕망의 존재인 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환상을 통해 욕망한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환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게 된다. 욕망의 대부분의 정체는 ‘결핍’이 아니라 ‘환상’인 것이다. 주상도는 나를 욕망하고 있다. 나에 대한 환상을 욕망하고 있다. 그 환상은 가짜의 나에 불과했다. 그는 누구가를 원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욕망할 뿐이었다.
소장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봤다.
“어떤 조직에서 장으로 있다는 건 외로운 일이야.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와서 고개를 숙이지. 권력은 그래서 비열한 냄새를 풍기게 돼. 숙성될수록. 나 두나 씨 어떻게 하겠다는 거 아니야. 저번에 내가 너무 심했던 거 미안해. 하지만 당신만 보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이 고무공처럼 부풀어 올라. 솔직히 이런 마음 처음이야. 이런 말 하는 거 나도 쪽팔려. 이 나이에. 하지만 내 마음 좀 알아주면 안 되겠어?”
저도 물론 소장님, 나쁘지 않아요. 소장님처럼 멋있고 잘생기고 카리스마와 전문능력까지 … 완벽 짱이죠.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죠. 아니라고요.
“두나 너처럼 유능한 연구원, 정규직으로 승진도 하고 또 연구소에 장도 되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봐.”
“소장님,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장님과 이런 관계는 칼을 물고 꼭두 위에서 춤을 추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위험한 게임. 그렇다. 줄 위에서 언젠가 떨어질 운명의 위험한 게임, 게임 말이다. 그 위태로운 줄 위에서 떨어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장은 비밀을 품은 듯한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한테 줄 서 있는 여자들 많아. 연구소엔 너만 여자가 아니야. 하지만 난 그런 애들 딱 질색이란 말이지. 손만 대면 금방 달려드는… 넌 뭔가 모를 매력이 있어. 엉뚱한 것 같기도 하고 발랄한 고양이 같기도 하고. 피가 서서히 달궈지는 느낌이야.”
그러더니 그는 내 뒷목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고개를 돌려 입술을 세게 흡착해왔다. 갑작스런 키스였다. 상체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읍~”
나는 소장의 뺨을 후려쳤다. 소장은 한쪽 뺨을 맞고 씁쓰레하게 웃었다.
숨이 막혔다. 삶과 죽음의 사이.
그는 어떤 힘인지 모르지만 나를 압도하는 힘으로 눌렀다. 지배와 예속 사이에서.
숨쉬기가 힘들다. 무기력과 생기 사이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서.
그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그냥 자기를 돕고 싶어.”
“…”
“이번 인사에서 정규직 자리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못 박아주지.”
이두나의 대뇌가 번쩍하고 전기가 들어왔다. 나는 처음으로 소장 쪽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승진도 남들보단 빠를 거야. 당신 동기들보단 말이야. 이제 됐지? 이 정도면? 내 여자가 되는 조건으로. 밑지는 장사는 아닐 텐데…”
소장은 여전히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코미디야. 코미디. 신체를 마지막 보루로 삼는.
옆 도로 위로 자동차가 휙휙 하고 지나갔다. 헤드라이트가 어둔 차 안에 있던 두 남녀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무대 조명등이 강렬하게 비치듯 눈이 부셨다.
다시 어둠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생선비늘처럼 반짝이는 강물 위 불빛을 보고 있었다. 나는 치마 양쪽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달달달 떨렸다. 어떤 폭풍 속을 통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심장이 발길질을 하듯 뛰었다.
선택, 그러니까 선택, 또다시 이두나는 선택의 순간 앞에 서게 되었다.
젠장, 이두나. 기껏 이거였어?
유혹은 끔찍하다. 죽음 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방기하듯 내맡겨야 하나.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흰 블라우스 앞섶 가슴에 손을 대고 나는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였다. 갑자기 앉아 있는 조수석 의자가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아악, 뭐예요?”
주상도는 내가 앉은 의자 레버를 눌러 뒤로 넘어뜨렸다.
“너는 영리한 여자니까. 내가 누군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지도 잘 알 거야.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거 말이야.”
목소리는 낮았고 세련됐다. 처음으로 무서움이 엄습했다.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생한 두려움.
한강 다리가 무시무시한 크기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넘어간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주상도가 나를 눌렀다. 그는 내 위로 서서히 올라오려 했다. 맙소사.
그는 바지 허리띠 버클을 풀었다. 자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