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
연구소에선 날선 두려움이 나를 에워쌌다. 승진을 앞두고 모두 날이 서 있었다. 추문이 기승을 부렸다. 나와 주상도와의 추문도 그중 하나였다. 연구소 연구원들은 계단이나 옥상 같은 곳에서 따로 접선했다. 정보원들은 그들끼리의 암호를 나눴다.
생성광학 연구소 전임공고 서류제출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마음이 급했다. 생성광학 연구소에 아는 선배가 이번에 꼭 원서를 내라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연구계획서를 작성해야 했다. 며칠씩 잠을 새다시피 했다. 주상도의 전화는 어김없이 내 휴대폰으로 달려들었다. 어떤 땐 부재중 스무 통도 더 많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예 내 전화기에 전세를 냈군 냈어… 연구소 구내식당에서 맞부딪칠까 두려웠다. 나는 도시락을 싸와 사무실에서 따로 먹었다. 연구소 직원들은 속으로 그러겠지. 이두나 여전히 쪼잔하군…
그 와중에도 나는 민진에게 봐봐. 이 작자가 이렇게 맨날 전화를 해댄다니까. 정말 죽을 지경이야. 그럼 민진은 난리 났네, 진짜 이 작자 널 좋아하나 보다. 사십대에 찾아온 로맨스? 낭만적인데… 아예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손진영 과장까지 찾아가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다.
손 과장은 분명 뭔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듯도 했다. 주상도를 달래면서 충고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손 과장은 평소에도 나를 꽤 신임한 사람이었다. 큰 프로젝트가 있을 때 공동 연구원으로 발탁해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허, 소장님이 그럴 분이 아니야. 무슨 말이야. 자네가 오해한 거겠지.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자 아닌가. 그런 분이 무슨…
손진영 과장은 아예 믿으려 들지도 않았다. 소장이 자신의 밥줄이고 연줄이고 생명줄이니 당연했다.
사람들은 적당히 수치스러운 비밀과 사소함, 위선과 체면으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제각각 자신의 냄새를 숨긴 채 수면 아래로 조용히 가라앉고자 했다. 누군가의 서사, 그것도 불행의 서사에 끼어들 만큼 떳떳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남의 연애사건일 뿐이었다.
뒤틀린 애정사가 흥미로운 간식거리는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끼어들 만큼 한가하지도 밥줄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말하자면 그렇다. 이런 따위는 정보지에 실린 기사만도 못한 꺼리다. 애정의 당사자와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영 다른 혹성에서 다른 전파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이 문제가 애정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왠지 나만 함정에 빠진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서 삼일 밤을 샜다. 집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배도 고팠고 잠도 고팠다. 연구계획서를 마무리해서 마음이 후련하기도 하도 또 무겁기도 했다. 빨리 생성광학 연구소에 취직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 이곳을 떠날 수도 있으니까.
뜨거운 욕조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운전을 하고 집으로 가면서 나는 건형과 함께하는 거품 목욕을 떠올렸다. 영화에 나오는 넓은 월풀까진 아니지만, 욕조가 있는 쪽 벽면이 유리벽으로 되어 아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호사까진 아니지만, 채널이 30개나 되는 텔레비전과 거대한 문이 있는 로비에 60층짜리 빌딩은 아니지만, 하얀 거품 속에 둘이 함께 비스듬하게 누워 와인 잔을 들 수만 있다면…
그런 날은 폭풍우가 치면 더 좋을 것이다. 우리가 있는 60층짜리 빌딩 39층의 객실은 폭풍우 속에서 흔들림을 즐긴다. 그러다 욕조 거품을 가지고 귀여운 장난도 칠 수 있을 것이다. 녹색 용액이 흰 욕조에 풀리더니 마치 마법처럼 가볍게 부푸는 거품이 생겨날 것이다. 나는 눈을 처음 만져본 사하라 사막의 아이처럼 거품으로 이것저것 모양을 만든다. 거품으로 건형의 콧잔등과 이마에 거품을 찍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글루도 만들고 스키 슬로프가 있는 산도 만들고…
그러다 거품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다시 우리는 녹색 바다 위에 뜨게 될 것이다. 그러면 건형과 내 몸에는 달콤한 아로마 향이 배어나겠지. 건형과 거품 목욕을 끝내고 다시 검은 아웃밴드 브라와 팬티를 입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향이 나는 알몸으로 목욕가운을 걸치겠지. 그럼 건형은 내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할 것이다. 섬세하고 소소한 손짓과 표정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사람들은 가끔 잊을 때가 있다.
거기까지 상상하자 몸이 노골노골해지면서 행복한 기운이 사지 신경 끝까지 퍼져나갔다. 감각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마음이 투명해진다는 것이다. 사흘 동안의 피로가 조금씩 행복감으로 밀려왔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파트를 둘러싼 숲은 어둑어둑했다. 바람이 술렁거렸다. 주차장 옆 놀이터가 있는 공터였다. 누군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몸을 쑥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