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정상에 다 올라온 듯했는데 여전히 오르막이 계속된다. 테오는 다시 씩씩대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낙엽들이 밟혔다. 누렇게 된 갈참나무 잎들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잘 모르겠어요. 같은 직장에 같은 전공이고 학계에서나 직장에서도 계속해서 보게 될 텐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오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느낌이에요.” 나는 업고 있던 아기를 둘러업듯 배낭을 한번 들어올렸다 내렸다.
“그 소장이란 사람, 왜 똥구멍에 불난 사람처럼 그러는데?”
“나도 몰라요. 아마 어렸을 때 무슨 큰 상처를 입었던 게 아닐까요? 동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모든 것을 유년의 상처로 돌리는 건 너무 환원론적이야.”
“부모와 조부모에게 지나친 사랑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거예요.”
“사랑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서 남을 사랑하는 법은 잘 모를 수도 있지.”
“연구소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
“미리 걱정할 건 없잖아. 그건 지나친 염려야…”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오로지 절망감뿐이라고요.”
“하지만 그 절망감도 곧 희망이 되겠지.”
정상이었다. 정상에서 조금 아래 나무벤치에 앉았다. 테오는 제대의 양초에 불을 붙이듯 종이컵에 보드카를 따랐다. 성스러운 의식처럼. 강한 향이 콧속을 후볐다.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저분한 서민 아파트도 위에서 보니 상자곽처럼 아기자기하고 따뜻해보였다.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죠? 예수님께 기도하란 말만 말고 말해보세요.”
“그런 놈은 메치기로 엎어버려야 하는데…”
하긴 테오 신부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누구든 메칠 수 있을 것이다. 주상도 소장 정도면 열 명이 달려들어도 훌륭히 해치울 수 있을 텐데…. 테오 신부가 주상도에게 결투를 신청하면 주상도는 소맷귀에서 스패너 같은 것을 들고 나올지도 모른다. 비겁하게. 볼트를 조이는 스패너 말이다. 주상도는 스패너로 당장에 테오의 대갈통을 끝장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오산. 테오 신부는 그의 손에서 스패너를 빼앗고 몇 번이나 그 작자를 땅바닥에 메꽂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신부님을 저 산간벽지로 보낼 수는 없죠.”
“예수님도 그런 놈은 때려눕히고 싶으실 거야.”
“…” 나는 한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내 삶을 휘저어놓는 것 같아요.”
“전엔 남자란 동물을 만나고 싶어 날뛰더니…”
“가죽이 벗겨진 소 같은 느낌이에요… 피가 살가죽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아…”
“어쩌면 그도 뭔가를 견딜 수 없는 거 아닐까?”
“뭘요?”
“삶을 말이야.”
“삶을?”
“그래, 이 지겨운 삶을… 그래서 누군가에게 집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거지… 사람들은 모두 삶을 견디지 못해서 사랑하고 견디지 못해서 이별하고 견디지 못해서 섹스하고 견디지 못해서 주먹질을 하는 거야. 사람들은 의외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게 아니라 행복이나 사랑 따위를 견디지 못하지. 행복하면 당장 불안해하면서 불행해지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당장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다니며 사랑하려 한다니까.”
“그 누군가가 나라는 게 힘들어요.”
“그 작자, 권력에 대한 자기확인 같은 걸 거야. 나르시시즘의 과잉이지.”
“언제까지 계속될지…”
“글쎄, 죽을 때까지…” 그러곤 테오는 히히 하고 웃었다.
“이런 저주를… 아예 저주를 하세요!” 나는 테오의 등짝을 몇 번이나 갈겨주었다. 테오는 히히거리며 남은 보드카를 마저 마셨다.
건형의 전화를 기다렸다. 몹시도. 하지만 건형의 휴대폰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을 게 뻔했다. 그는 알래스카까지는 아니지만 캐나다 북쪽 지방에 출장 간다고 했다. 매우 추운 지방이라 전화를 한다면 목소리에 고드름이 뚝뚝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그의 휴대폰도 오들오들 떨고 있을 게다.
그는 다만 이메일로 [잘 지내지? 보고 싶어… 우리 빨리 3번하자. 아니 4번이었나?] 하고 번호를 헷갈려 할 뿐이었다. 나는 [그래 나도 3번… 응 4번도 하고 싶어^^] 하고 응대하며 웃는 이모티콘도 찍어주었다.
약간의 슬픔이 오려 했다. 그는 너무 멀리 있다. 주상도는 너무 가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