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차를 들고 민진의 책상으로 가자 민진은 빙글빙글 나를 보고 웃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심각하게 묻는 이두나,
“글쎄, 너한테 좋은 일 있는 거 같은데?” 민진이 받는다.
“나한테 무슨… 일?”
“야, 어제 너 대학로 와인바에서 소장이랑 데이트 했다면서?”
“으응?” 심장이 두 개로 쪼개지는 듯한 이두나,
“야야, 뭐야, 주상도는 유부남이라 했잖아. 너 건형이 있는데 또 장기보험 드는 거야? 아무리 양다리가 유행이라 해도…”
“무슨 말이야.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직장 내 상사하고 연구원하고 만나는 게 무슨 데이트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이두나,
“야야, 귀청이야.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
“대학로… 그것도 거의 멤버십에 가까운 비싼 와인카페에서 만나는 게 전기 저장 방식을 수학적으로 데이터 분석하기 위해 만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글쎄…” 민진은 내 말을 무 자르듯 뚝 잘랐다.
“야, 근데 너랑 주상도랑 만나는 거 이구선하고 맹아부가 봤다잖아.”
“뭐?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 아주 흥미로운 간식거리 생겼다고 생각하겠지. 따분했는데 말이야. 학회 회의 끝나고 연구원들이 분위기 좋은 곳에서 프로젝트 예산 쓰려고 와인카페에 들렀나봐. 그런데 너랑 소장이랑 있더라나. 둘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데…”
“무슨 말이야… 나도 너한테 할 말이…” 또 무를 자르고 마는 민진.
“또 놀라운 사실은 주상도가 오늘 승진 심사 과장급 회의에서 너를 승진시켜야 한다고 극구 너를 밀었다더라. 연구실적도 최고고 프로젝트 보고서 가장 잘 쓴다고 하면서…”
믿을 수 없는 사실이군.
“이거 너무 진도 빠른 거 아닐까?” 민진은 분명 이죽거리고 있었다.
“민진아, 그게 아니고….”
민진도 승진 대상자였다. 그것도 오 년째. 왠지 절친한 아군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민진과 나는 서로의 삶을 훔쳐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슬아슬한 서로의 운명을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운명을 믿어주고 밀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 비밀은 증식되었다. 삶의 몇몇 부분들을 감추기 위해 그 사이에 칸막이를 쳤던 셈이다. 90도 꺾어진 벽 뒤에서 걸어오는 누군가와 부딪쳐버린 사람처럼 나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충돌이 생긴 셈이었다. 마음속이 동요했다. 소란스러웠다.
좀 전, 복도를 지나칠 때가 떠올랐다. 엔트로피가 잔뜩 올라간 실험관 속을 통과하는 느낌. 연구원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팽팽한 고압선이 내 몸을 관통했던 것이다.
휴대폰이 드드득 땅을 파댔다. 주상도의 전화였다. 나는 민진을 피해 복도 쪽으로 달려갔다. 복도 쪽 유리창에 코를 박듯 기댔다. 조심스럽게 폴더를 열었다.
“미안해. 어제 술기운 때문에 내 정신이 아니었어. 용서해.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내가 연구소를 그만둘게. 잘못한 내 손을 가르고 싶을 지경이야.”
연구소를 그만두겠다는 소장의 말을 듣자 왠지 그에 대한 분노가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 그도 연약하고 심약한 인간이다. 악하기보다 약한 인간 말이다. 그의 사과를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단칼에 잘라야 할까. 삶은 여러 겹의 질문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단호함이 필요하다. 용서라니. 나는 주상도에게 용서란 없어. 이 조직에서 실수, 그것도 두 번씩이나 실수한 조직원을 살려줄 거 같아? 너 같은 건 더 이상 살려둘 필요조차 없어…라고 말하며… 회칼로 배 깊숙이 찌르듯 말했다.
“도대체 왜 이러세요, 소장님. 더 이상 전화하지 마세요. 이젠 사적으로 만나거나 대화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승진심사에 저를 밀었다고 들었는데… 저는 싫어요. 싫다고요. 당장 그만 두세요. 그리고 용서할 수 없어요. 어제일…” 복도를 오가는 연구원들을 피해 나는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최대한 목소리를 죽여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용서해달라고 했잖아. 그리고 승진 심사, 부담스러워하지 마. 이두나, 너는 충분히 자격이 되니까.”
“아뇨, 절대로 안돼요. 싫습니다.”
“흥, 싫다고? 정규직이 되는 게? 그건 모든 비정규직의 꿈 아냐?”
“…”
“뭐, 싫다면 할 수 없지만… 그건 그렇고 내 전화를 안 받겠다? 정말 내 전화 안 받을 거야? 안 받을 수 있을까?”
소장은 위압적인 목소리에서 조롱 섞인 목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소장님. 싫어요. 제발… 더 이상…”
나는 점점 애걸하는 목소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 힘들게 하지 않을게. 우리 천천히 친해지면 되잖아?”
친해지긴 뭘 친해진다는 건가?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살충제를 그에게 쏟아부었다.
“안되겠어요. 소장님, 더 이상 전화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가. 잘못 꾸며진 비정한 전략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삶의 광기 같은 것이기도 했다. 사실 인생살이란 한심하고 권태로운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 한 대상을 정해 골똘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점점 더 광기로 변해간다. 그건 지리멸렬한 시간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이다. 소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자루 속에 잘못 빠진 토끼처럼 자꾸만 어리석은 욕망에서 허우적대는 듯했다.
대형 유리창 밖은 온통 햇빛이다. 건너 실험동 태양열 천장 유리창이 햇빛으로 반짝였다. 눈이 부셨다. 단단한 햇빛이 밧줄처럼 사방으로 뻗었다. 목을 조여 왔다. 태양은 어두운 흑점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분노가 서서히 몸을 데웠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뭔가 위험한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