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가증스러운 것. 갈기갈기 찢어 두개골부터 내장, 손톱, 발톱까지 다 남김없이 씹어 먹어 주리라. 나는 서서히 주먹을 쥐어보았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손이 떨리는 게 아니었다. 휴대폰에 진동문자가 온 것이다.
폴더를 다시 열었다. 주상도 자식 또 뭐야? 식칼을 어깨 너머까지 들어 올리듯 폴더를 휙 열었다.
건형의 문자였다.
[두나야, 보고 싶어, 1번이야…]
1번,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숫자… 가슴 떨리는 숫자… 폐부 깊숙이 알지 못할 슬픔이 날아드는 숫자. 나는 한참동안이나 건형이 보낸 1번이란 숫자를 들여다보았다. 건형과 사귈 때 우리가 나누었던 암호명 1번, 2번, 3번 그리고 4번, 5번, 6번…
남이 알지 못하는 우리만의 단어들을 공유하자 한 것은 건형이였다. 2번은 보고 싶어, 3번은 키스하고 싶어, 4번은 어디야? 5번은 심심해, 6번은 오늘 같이 있자, 7번은 잘 자, 8번, 9번, 10번…
[나도 1번이야…]라고 문자를 보냈다. 1번, 우리의 영원한 숫자, 1번. 그건 바로 [사랑해]였다. 나는 사랑의 힘으로 페달에 더욱 힘을 가했다. 내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천천히 뺨을 타고 흘렀다. 세탁기는 몸을 이리저리 뒤뚱거렸다. 세탁기는 세탁물을 이렇게 척 저렇게 척 패대기 질을 잘도 쳤다. 주상도를 저렇게 패대기칠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날 며칠 페달을 밟고 이 지구에서 달까지도 다녀올 수 있으리라.
다시 하복부에 묵직한 통증이 찾아왔다. 뜨끈한 액체였다.
“야, 세탁기 그만 돌려!” 형두였다. 자다 나왔는지 눈을 제대로 뜨질 못했다. 한나 언니는 안방에서 잘 자고 있는 듯했다.
“으으, … 그래.”
욕실로 갔다. 옷을 벗었다.
샤워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었다. 그러자 얼룩무늬 욕실 바닥으로 붉은 것이 흘러내려왔다. 핏물이었다. 들어오자마자 닦아냈는데 다시 하혈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무엇을 한 것인가.
나는 아랫배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삶이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았다.
며칠 새 햇빛이 두터워졌다.
바람이 쌀쌀했다. 그런데 햇볕은 따가웠다. 버스는 들판을 통과하고 있다. 버스에 탄 사람들 중에는 스웨터 입은 이도 있었다. 긴팔 모 재킷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내서인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다.
강둑이 나왔다. 나는 창밖 풍경을 내려다봤다. 강둑에 도열한 포플러 잎들이 조금씩 바래지고 있다. 머지않아 잎들도 다 떨어지겠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강어귀엔 과자, 라면 따위의 포장재들, 스티로폼, 폐타이어 같은 생활 쓰레기들이 엉겨 있었다. 지자체가 지역환경 보호라는 정책을 내세워 강어귀를 청소한 이후부터 강 주변은 잡초들의 차지가 되었다. 강은 천천히 흘렀다. 길고 아름다운 머릿결을 흔들면서.
나는 이 도시의 강을 사랑했다. 강물은 리듬과 정지를 가르쳤다. 때로 흘러가선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을 기억나게도 했다. 그것은 어떤 서늘한 분노나 슬픔, 성욕이나 가혹한 꿈같은 것이기도 했다. 햇빛 아래 정지한 듯 흘러가는 많은 것들. 뭔가 흘려보낸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강은 깊고 아늑한 눈동자로 시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날엔 강둑 쪽으로 개를 데리고 산책하면 좋을 것이다. 햇빛과 바람 속에서 개는 온 몸의 털을 털며 시원해할지도 모른다. 털 안에 살고 있는 많은 기생충들이 햇빛 속에서 얼마나 까르르거리며 웃을까. 기생충들도 일광욕을 즐길 권리는 있으니까.
그러면 개는 더욱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개를 천천히 끌고 강 가까이로 가는 것이다. 그리곤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를 재빨리 번쩍 들어올린다. 개는 영문을 몰라 할 것이다. 그럼 나는 개를 강 한가운데로 냅다 던져버리는 것.
그러니까 오늘은 개를 강에서 도살하기에 딱 알맞은 날씨다.
포트에 물을 부었다. 많이. 물을 끓인다. 천천히.
민진은 어, 물 많네? 나도 한 잔 부탁해. 설탕 없이 원두 알지? 나는 민진을 돌아보지도 않고 정면을 주시하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옛날 중국에는 처형의 방식이 다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넓디넓은 땅덩어리만큼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풍습과 문화, 취향 심지어 언어까지 달랐다.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일벌백계가 필요했다.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졌다. 형벌 중에는 팽(烹)이란 게 있었다.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서 그 안에 사람을 넣어 삶아 죽이는 방식.
나는 포트에서 물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손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주상도만 내 앞을 지나가지 않길 바랄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