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지독한 아픔이 전해왔다. 나는 절규했다. 그의 완력에 묶인 양팔을 버둥거렸다. 있는 힘을 다해 더러운 개구리를 밀어젖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뺨을 때렸다.
주상도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자신의 양복 깃을 곧추 세웠다.
택시에는 한밤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디제이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가을밤은 낭만적이고 달콤한 듯했다.
나는 흐트러진 옷자락을 고쳤다. 앞섶을 꽉 매고 팬티를 끌어올렸다. 주상도를 노려봤다. 택시 안은 그와 나의 숨소리만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이었다. 이윽고 그는 위엄 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난, 여기서 내려야겠어. 어, 여기 택시 세워주시오.”
멀쩡한 목소리였다. 택시가 멈췄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의 뺨을 때리기 위해 오른팔을 들자 그가 거칠게 내 손목을 잡았다.
“어허, 이런 너무하잖아. 왜 이래, 그 정도 하면 됐어. 너도 좋았잖아. 앙탈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너무 갑작스런 기습이어서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상도 소장은 입가에 가득 묻은 침을 닦았다. 그는 품위 있게 웃으며 차창으로 몸을 숙였다.
“내일 봐. 조심해서 가고…”
택시가 움직였다.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를 노려봤다. 다시 몸을 앞으로 추슬렀을 때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맥이 풀리면서 쓰러질 듯한 현기증이 왔다. 천천히 가슴팍의 블라우스 단추를 채웠다. 허리까지 올라간 치마를 다리 아래로 내렸다.
택시가 바람을 가르고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밤의 영화음악은 이번은 <태양은 가득히>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창문 밖 풍경을 바라봤다. 뭔가 잘못 꾼 악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굴욕과 모욕감이었다. 이런 일들은 내 삶의 예정 속엔 절대로 없었던 일이었다.
팬티 밑이 축축했다. 손을 집어넣어보았다. 끈적한 것이 묻어 있었다. 피, 피였다. 시트 위에도 피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어떻게 한 거야? 도대체…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릴 거야.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온몸의 전기가 방전되었다.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 내일까지. 전기 에너지 저장 비축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정리해야 하고 2차 프로젝트 연구계획서를 써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츄리닝을 입고 발전용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가속도가 붙은 페달은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다리가 공중에 붕 뜬 것 같다.
웅웅웅―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먼 나라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나트륨 펌프와 신경전달물질들이 전기의 힘을 빌려 왕성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기억이 찾아든 것이다. 그 끔찍한 기억이.
기억이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나를 괴롭힌 것은 망각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어릴 때 친구 집에서 훔친 인형이 내 책가방에서 나올 때의 장면, 만화방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살그머니 와서 나의 성기를 만지던 기억,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와 서로의 젖가슴을 만지고 놀다 엄마에게 들켰던 기억, 대학 축제 때 오랜만에 치마를 입고 걸어가다 학과 남자애들 앞에서 꽈당 하고 넘어지던 기억… 이런 기억들 말이다.
그러니까 기억, 뇌의 배선 회로에 있던 기억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발전용 자전거 페달을 돌리다 천천히 왼쪽 젖가슴을 만져보았다. 젖꼭지 옆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지우려 했다. 하지만 택시 안 풍경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땀을 흘리며 안간힘으로 밀어내려 했던 육중한 무게, 숨을 끊어놓을 듯 누르던 힘, 뒷목덜미를 잡던 완력, 입술을 강하게 누르던 중력과 하복부의 통증까지. 섬세하고도 친절하게 뇌의 기억회로가 풍경을 그려주었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하게.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때였다. 츄리닝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드드득 진동했다. 주상도의 문자였다.
[잘 들어갔어? 두나, 넌 내 여자야]
소름이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