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하긴 연구원들과 차를 마시며 영화나 공연에 대한 낭만적 감상을 털어놓기도 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여자 연구원들은 모두 그의 감성적인 모습에 감탄했다. 그들은 팬티를 벗어 무대 위로 던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 소장님, 감성이 정말 풍부하신 분 같아요. 이과 사람답지 않게…”
“좀 주책이죠? 남자가 괜히 낭만적이어서…”
“웬걸요? 낭만적이란 건 좋은 장점이죠. 그만큼 사물에 민감하게 공감한다는 거니까.”
낭만적인 것이 주책이 아니라 낭만적이라고 떠드는 것이 주책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다 나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래도 그는 한국 미래 과학자 중 최고의 실력자가 아닌가. 그런 유력한 거물과 함께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이긴 했다. 그는 와인바 의자에 앉으려 할 때 내 의자를 뒤로 빼주는 매너까지 보여주었다. 여성에게 세련된 매너가 몸이 익은 사람 같았다. 옆 테이블에 젊은 커플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의 뺨이 닿을 만큼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희 집안 쪽 작은아버지는… 두나 씨 알지 모르겠는데… 주자 태자 정자입니다.”
“환경 위생학 쪽에서 유명한 그 주태정 박사요? 그럼, 알다마다요. 당연히 이쪽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바죠.”
“아, 예…”
주태정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환경 위생학계에 이론적인 체계를 정리해온 저명한 학자였다.
“작은아버지 덕분에 오히려 내가 자리를 잡는 데 불편함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모두 누구누구 조카라고 말하는 바람에… 워낙 유명한 분이니까 그것이 오히려 큰 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주태정 박사는 학계에서 유명했고 전공자들에게도 유명했다. 그는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적 일화를 남긴 인물이었다. 대학 석사과정 때 나보다 한 세대 위인 나이든 선배가 주태정 박사 전설을 전해줬다. 삼국유사보다 깊고 오래된 이야기였다.
선배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선배는 대학에서 주태정 박사에게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박사의 조교를 했다. 어느 날 주태정 박사의 심부름으로 박사의 집을 찾아가 부탁한 물건을 전해주고 오던 차였다. 마침 화장실이 급해 그 집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선배는 아연실색을 했다. 당시 모든 집이 재래식 화장실이었고 휴지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했다 싶더란다. 주태정 박사 집 화장실에 이번 학기 중간고사로 본 답안지 뭉치가 밑씻개로 놓여 있더란 것. 그 뭉치에는 선배의 답안지도 놓여 있었다. 당시에 재래식 화장실 휴지로 신문지, 일일달력이 놓여 있기도 했다. 하지만 답안지가 놓인 것은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재활용 위생학의 표본이었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주상도 소장은 곧이어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모차르트와 쇼팽을 좋아했다. 그리고 편지쓰기를 좋아하고 개를 좋아하고 바둑을 좋아했다.
그는 다양한 취미와 온화한 위엄을 가진 완벽한 남자, 그 자체였다. 가정은 그 완벽함의 꽃이었다. 자식은 없었다. 하지만 착하고 재능이 뛰어난 아내가 있었다. 물리학계 엘리트라는 게 민진의 말이었다. 아내의 친정집 또한 명문가 집안이라 했다.
물론 그도 섹시하고 관능적인 여성을 숭배했다. 하지만 구매 가능한 상품들 가운데서 가장 순한 여성인 자신의 지금 아내와 결혼했다. 그 어긋남을 스스로 자책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부재를 떠올릴 때마다 아내를 질책했다. 혹은 다른 이에게 아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시간이 점점 익어가고 있었다. 주상도 소장은 실제보다 부풀려 말을 하긴 했지만 재미나게 말을 이어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는데 착한 사람이죠. 결혼하기 전에 잘나가던 물리학 수재였습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약한 편입니다.”
“어머, 그렇군요. 잘 보살펴 드려야겠네요.”
다음에는 아내와 자신의 성생활 위기에 대하여 늘어놓질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는 비밀을 밝히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선심을 얻거나 위로받으려 했다. 그는 과장스러울 만큼 솔직했다. 아내와의 잠자리까진 아니었다. 남녀의 감정과 육체에 대한 자기 나름의 철학이었다. 자신이 솔직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철저하게 침투하려 했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까지 순교를 강요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두나 씨는 남자친구 있죠? 소문에 옛날 남자친구 다시 만난다 하던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민진이야, 현수야? 정부(情夫)와 바람피우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얼굴을 붉혔다.
“하하, 놀랄 건 없어요. 일주일에 몇 번 만나나? 만나면 자기도 하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그런다던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럼, 다행이고… 뭐하는 사람인가요?”
다행이라니, 내가 모텔에 가든 방앗간에 가든 무슨 상관이야. 하루에 세 번을 하든 다섯 번을 하든 무슨 상관이야, 오럴 섹스를 하든 항문 섹스를 하든 무슨 상관이야, 남자친구가 벽돌공이든 격투기 선수든 무슨 상관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