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내 말은 네가 원치 않게 키스를 하게 되었더라도 너무 자의식으로 징징대지 말라는 거야.”
“내가 징징댔니?”
“우리 나이에 키스 한번 한 것 같고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것 자체가 주책으로 보인단 말야. 원해서 했든 원하지 않고 했든.”
“야, 우리가 폐경 지난 노파냐?”
“서른둘이면 충분하지.”
“충분하긴 뭐가 충분하단 거야?”
“애도 못 낳고 폐경을 맞게 될지 누가 아냐? 매달 생리하느라 자궁만 고생한 거지.”
“난 아직 성적으로 충분히 호르몬이 발산되고 있어.” 자신 있게 말하는 이두나,
“그래, 그러니 키스에 사랑의 교감이니 뭐니, 다 사치스러운 말이야. 호르몬에 충실하면 돼. 내 말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 많은 감정의 무게를 입혀 오버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민진은 나와 같은 싱글녀다. 그러면서도 연구소 안에 결혼한 후배 심지어 선배에게까지 상담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남편이 어젯밤에 안 들어왔어요. 민진 선배, 어떡해요?”
“응, 시간 지나면 해결돼.”
“시어머니 때문에 죽겠어. 매주 휴일마다 우리 집에 찾아온다니까.”
“응, 시간 지나면 해결돼.”
성상담까지 은밀하게 부탁해올 때도 있다.
“민진 선배, 남편이 어젯밤 그걸 하는데 꼭 우는 사람처럼 내 얼굴 위에서 헉헉대는 거 있지? 어떻게 된 거야?”
“응, 시간 지나면 해결돼.”
그러니까 상담의 대답은 늘 같은 말이었다. 남편이 외박을 해도 시댁이 괴롭혀도 부부 관계시 불만이 있어도 대답은 같다. “응, 시간 지나면 해결돼.”
같은 대답을 들어도 내담자들은 모두 큰 공감을 얻은 듯했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시간은 많은 것을 해결한 것 같기도 했다. 시간만큼 난폭한 폭군도 없다. 하지만 시간만큼 훌륭한 해결사도 없다. 내담자들은 모두 민진을 마음속에서 깊이 신뢰하고 잘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민진은 내담자들에게 성적 테크닉까지 상세하게 설법하기도 했다.
민진은 인간의 모든 심리학적 성적 불만과 고민들도 따지고 보면 생물학적 진실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다. 시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분출되는 1억 개의 정충들의 질주, 다른 난자의 두꺼운 세포막을 뚫고자 하는 정충들의 외도, 체면이나 교양보다 자식을 위해 돌진하는 모성의 무모함이란 콤플렉스까지.
그래,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야. 주상도 소장은 합리적이고 세련된 사람이니까. 공인으로서도 더 이상 무리를 할 사람은 아닐 거야.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사과도 했으니까… 설사 나에 대한 어떤 이성적 감정이 있다 해도 단순히 지나가는 감정일 거야.
섭씨 36.5도의 따뜻한 온도를 가진 어떤 생물학적 진실이 있는 한 주상도 소장도 크게 실수할 사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그는 엘리트다. 우리는 같은 직장 동료다. 온당한 사회적 진실을 만들 것도 같았다.
나는 천천히 양쪽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휴대폰 문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서 뵐까요?]
“아버지는 하급직 기술자였소.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죠. 삼형제이고 제가 첫째지요. 장남이라 할아버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엄마의 사랑은 더 끔찍했고.”
주상도 소장은 특별한 사랑과 기대로 자란 사람답게 웃었다. 구김살 없는 웃음이었다.
대학로에 있는 웨스턴 분위기의 와인 바였다. 짙은 밤색 나무 바닥과 등받이 의자가 조화로워 보였다. 테이블마다 물이 담긴 초 받침대 위에 작은 초가 동동 떠 있었다. 음악은 모던 재즈였다. 그는 젊은 분위기를 애써 고른 것 같았다. 청바지에 통가죽 벨트를 하고 있었다. 최근 유행하는 골반 청바지였다.
“엄마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소. 돌아가실 때 눈을 못 감으시더라고. 사랑하는 아들을 혼자 세상에 남겨놓고 간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던 게죠. 병원 입원실에 있는데 온 식구들이 다 모였어요. 아버지, 삼형제, 식구들 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엄마, 이제 다 됐어요. 마음 편하게 하고 돌아가셔도 돼요. 편히 눈 감으세요. 저 괜찮아요… 그러니까 엄마가 눈물을 쭈욱 하고 흘립디다. 내 손을 꼭 잡고 한참을 계시대요. 깊은 호흡을 한 번 쉬시고는 숨을 거두셨어요. 엄마는 아들을 못 본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던 것 같아.”
“예, 소장님, 정말 많은 사랑을 받으신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사에게 최대한 예의를 다하는 부하 직원처럼.
“그런데 제가 좀 낭만적이지요. 가을이면 훌쩍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져요. 영화 보거나 공연, 연극 보러가는 것도 좋아하고… 삼양목장 갔을 때도 좀 들떠 있었던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