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글쎄, 주상도 소장이 유부남이란다.”
“…?” 자판 앞에서 갑자기 손을 멈추는 이두나,
“여자 연구원들이 모두 싱글로 알고 있었잖니? 매너 있고 세련되고 친절하고… 돌아온 싱글이든 그냥 싱글이든 모두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본인도 결혼한 이야기를 애써 피했고… 그래서 다들 충격, 공황,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는 거 아니니. 다들 절망이라고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충분히 있을 법했다. 하지만 뺨을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해졌다. 뭔가 좀 통속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통속이야, 통속. 아내를 둔 유부남이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제자뻘 되는 연구원과 연인이 되려는 일. 진부하고 식상한 일이다. 그러나 흔해빠진 사건의 중심에 내가 서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주상도는 처음부터 내게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 때로 친절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심드렁하게 복도를 지나칠 때도 많았다. 저번 야유회 때도 다른 여자 연구원들과 정겹게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몇 번 본 적도 있다.
가끔 회의나 회식에서 내게 눈길을 줬다. 좀 놀란 적도 있다. 그러나 눈길을 줬다고 해서 몸이 뜨거워질 필요는 없다. 눈길이 마주치는 일은 허공 중에서 무수하게 오가는 전류가 우연히 맞부딪친 일에 불과하니까. 전기 신호의 송신이 우연히 부딪친 일로 어머, 날 찍었나 봐~ 하고 뒤집어질 필요는 없는 거다.
휴대폰이 기다렸다는 듯이 드드득거렸다. 책상 위에서 갓 잡은 생선처럼. 주상도의 문자였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저녁을 사겠다는… 문자였다.
“민진아, 너 키스한다는 게 뭐라고 생각해? 그것도 원치 않는 상대랑?” 나는 민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머, 너 건형이랑 키스했구나. 내 너희 둘 그럴 줄 알았다. 건형이랑 또 다시 시작하려고?”
“아, 아… 그게 아니라…”
“어휴, 이두나, 내숭 그만 떨어.”
“키스는 몸과 마음이 상호 삼투작용을 하는 거 아닐까. 순수한 객체로서의 몸들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투사시키는 거. 그러니까 내 입술의 전극과 상대 입술의 전극이 만나면서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기장이 만들어지는 거지. 각각 타자화된 몸들이 입을 맞춤으로써 전기를 발생시키는 주체가 되는 거… 충일한 느낌 같은 거 말야.”
“…” 민진은 빙긋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한쪽이 구리 절연체처럼 전기가 흐르는 것에 저항한다면 그런 키스는 폭력적일 뿐이야. 정전기처럼 스파크만 일어날 뿐이지…” 내가 말했다.
“어휴, 이두나, 우리가 지금 십대 사춘기 소녀냐? 청승떨고 있네.”
“…”
“이두나, 키스가 별거니? 단지 생물학적인 작용에 불과해.”
“어떻게 생물학적이야? 그건 철저하게 전기화학적이고 심리교감적이야. 인간의 몸속 전기가 교감을 향해 나아가는…”
“교감은 무슨 교감이냐?”
“동물들은 키스하지 않아. 짝짓기를 하지.”
“봐봐… 사람의 몸은 우선 생물학적 진실을 산다고 봐. 인간은 자신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닌 자로만 인식하지 실제 육체를 지닌 자라는 것을 너무 쉽게 망각하곤 해.” 민진이 말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내가 말했다.
“알아도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알아야지. 평생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은 40톤이야. 몸은 일생 동안 소 네 마리, 돼지 스무 마리, 과일과 야채 7천 킬로그램, 기름 6백 킬로그램을 먹어치워. 이 음식들을 씹고 위와 창자에서 반죽하고 잘게 부숴 소화하는 데 매일 1.5리터의 침, 3리터의 위액, 2리터의 췌장액, 2리터의 장분비액, 0.5리터의 담즙이 소비되지. 한번 미소 짓는 데 17개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고, 입맞춤을 하는 데 29개의 근육을 움직여. 평균수명을 74세라고 한다면, 24년간 잠자는 데, 4년간은 꿈꾸는 데 쓰고 9년 동안은 일하는 데에, 95일은 이 닦는 데 쓰고, 텔레비전을 보는 데 2,250일, 이러저러한 일로 줄서는 데 140일, 시계 보는 데 3일, 우는 데 52일, 웃는 데 630일, 사랑하는 데 110일을 쓰지.”
“아, 요점만 말해. 무슨 서론이 이렇게 길어?”
“아직 안 끝났어. 우리의 신체는 끝없이 뭔가를 소비하고 쩝쩝대고 소화하고 교환하는 끝없는 활동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사람과 키스하는 것? 그건 9밀리그램의 물과 0.4그램의 소금을 교환하는 일에 불과해. 그런 생물학적 진실 앞에 우리는 겸허해야 한다고.”
“키스를 단순하게 생물학적 진실로만 규정하는 것은 너무 심해. 방귀가 나오니까 방귀를 뀌고 트림이 나오니까 트림을 하는 거, 그런 신체적 신진대사의 하나 정도로 키스를 규정하는 건 너무 냉담한 자기도취야. 싱글녀들의 자위행위 같은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