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잠깐 와서 아침 커피 같이 하죠.”
소장실 안에 고상과 도도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 저는 일이 많아서…”
“무슨 일… 커피 마시고 천천히 해요.” 그렇게 말하더니 소장은 실내 슬리퍼를 끌고 티 테이블로 갔다. “지금 막 내린 원두커피라 맛있을 거요.” 달콤한 쿠키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어제 나한테 장문의 메일을 보냈던데…”
그는 아무 일이 없는 사람처럼 커피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고상과 도도는 “이두나 선배, 무슨 메일을, 그것도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는 거야?” 그러곤 킥킥댔다. 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소장은 야릇한 미소를 띠며 나를 정면으로 보고 앉았다.
“내게 그렇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죠. 이두나 씨가…”
주상도가 눈을 반짝였다. 나는 벌겋게 된 얼굴로 주상도를 바라봤다. 고상과 도도가 다시 킥킥대며 웃었다. 그리곤 나와 소장을 번갈아보더니 커피를 마시고 먼저 나가버렸다.
고상과 도도가 나가자 소장은 고개를 숙였다.
“어제, 내가 한 행동이 실례였으면 미안합니다. 사과할게요.”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분위기였다. 갑자기 분노와 모욕감, 어제의 사건들이 다 녹아버리는 듯했다. 싸늘하고 예리한 전극처럼 비명을 지르던 누전이 갑자기 온화해진 느낌이랄까.
“아, 아…, 저…”
“그래요, 내가 큰 결례를 했소. 용서하시오.”
“아, 소장님이 그렇게 사과를 하시니 다행이군요.”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금방 시인하는 예의 바른 신사임에 틀림없다. 그는 다정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재에다 놀라운 조직 통솔력까지. 그는 미래 한국 과학을 이끌어갈 십 인 중 하나다. 지난 밤 그를 더러운 개구리 새끼라고 욕했던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명민한 천재도 가끔 제 욕망에 못 이겨 실수할 때가 있다. 어젯밤이 바로 그때였다. 우발적인 욕망이 무리를 한 것이다.
며칠 뒤엔 프로젝트 중간보고 일정이 잡혀 있었다. 정규직 승진 심사를 위해 서류를 준비해야 했다. 생성광학 연구소 전임 공채에 낼 원서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순수하게 바빴다. 바빴기에 주상도 소장과의 일 따위를 다시 되씹어 생각하고 삼키고 소화할 시간이 없었다. 충분히 순수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할 일이 많았다. 비명을 지를 만큼.
“야!” 민진이었다. 내 어깨를 세게 툭 쳤다.
“너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
“나, 바빠. 일해야 해.”
“야,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냐?”
“응…” 나는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민진은 종이컵을 빙글빙글 돌리며 쥐색 리바이스 진을 내 책상모서리에 기대고 선다.
“뉴스가 있는데…” 그녀는 빙글빙글 웃으며 꽤 흥미 있는 표정을 지었다.
“응, 뭐?” 자판을 빠르게 치며 심드렁하게 말하는 이두나. 민진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실은 우리 연구소에서 여자 연구원들한테 인기 많은 주상도 소장 있잖아. 비밀이 있었더라고…”
“응, 주상도 소장?”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혹시 나와 주상도 소장에 대한 소문이 난 건가? 벌써 소문이 돌리는 없는데… 연구소에 혹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곤란한데…
몇 년 전 일이었다. 책임연구원과 연구원의 연애 사건이 터진 적이 있었다. 이런 류의 사건은 너무 진부하고도 진부한 사건이었다. 인터넷 뉴스에서 수시로 터지는 가십거리도 되지 않는, 그러니까 아침에 신은 양말 색깔만큼 사소하고 식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가십은 연구소 내에서 흥미로운 여가생활 중 하나다. 이구선이 맹아부와 여가생활을 즐기고 맹아부는 고상, 도도와 여가생활을 즐긴다. 고상과 도도는 좀더 양념을 친 다음 다른 연구원 후배들과 여가생활에 빠진다. 그들은 서로 끼리끼리 모여 구석진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자기만 알 수 있는 암호를 주고받은 뒤에 접선을 한다. 귓속말로 속삭이기도 하지만 호프집에서 큰소리로 떠들면서 낄낄대기도 한다. 여가생활은 두세 명이 정원이지만 복식조가 되기도 한다. 가십은 충분히 현대사회의 열광적인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그러니 무릇 평판에 불리한 증거물이 될 수 있는 편지란 뒷날의 화근이기 십상이다. 유부남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 편지, 이니셜이 새겨진 커플링. 그걸 없애는 게 차선책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찍지도 쓰지도 사지도 않는 게 현명한 노릇이다.
그러나 낭만적 연인들이 다 그러하듯 40대 책임 연구원과 20대 연구원은 서신과 시와 선물을 교환했다. 40대 책임연구원은 연애에 성실했다. 그것도 충분히. 충분히 성실했기에 그의 편지는 진실했다. 진실했기에 민망했다. 그의 면모는 곧 연구소에 알려졌다.
-네가 노란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날, 내 온 몸의 정충이 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넌 노란 원피스를 입고 노팬티라고 내 귀에다 속삭였지…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컴퓨터 화면엔 전기 전류 도선표가 그려진 도표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온 몸의 신경이 양 귀 쪽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주상도 소장이 뭘?” 내가 들어도 약간 떨리는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