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아니다.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울퉁불퉁하게 정리되지 않는 모욕감은 뭔가. 아무리 소장이지만 이 상황에 대하여 적어도 내 의사를 밝힐 필요는 있다. 어쩌면 아주 근사치의 오류로 방향이 영 빗나간 다른 쪽 지평선을 보며 걷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런 일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는 아직 초벌빨래도 다 못한 상태였다. 초벌을 끝내면 3번의 헹굼과 탈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 에너지 몇 백 칼로리를 더 필요로 할 것이다. 빨래가 허연 거품 속에서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왔다.
책상 앞으로 갔다. 컴퓨터를 켰다. 녹색 에너지 연구소 홈피는 이 밤중에도 빛을 반짝였다.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연구원 소개’에서 주상도 소장을 찾아 클릭했다.
나는 어두운 방안에서 발광(發光)하는 컴퓨터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컴퓨터 이메일 발신란의 커서만이 눈을 깜박였다. 내가 무얼 할지 지켜보는 듯했다. 나는 무언가를 써야 했다.
-주상도, 이 새끼야,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만만해?
물론 이렇게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장님, 직장 내 성희롱은 법률 몇 조 몇 항에 위배되는 것으로 몇 년 이하의 징역 혹은 얼마의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정상을 참작해서 이번 한 번의 실수는 봐주겠습니다만 또 한 번 그럴 시에는…
이건 아무래도 너무 위협적이고 너무 형법적이고 너무 법치주의적이다.
-소장님, 여자 연구원에게 너무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닌가요? 저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란 말입니다. 소장님은 제 가슴을 함부로 만지고 제 입에 강제로 키스를 했습니다. 이건 명백하게 사회적 약자인 여성 몸을 유린한 것입니다.
이건 너무 노골적인 성묘사란 생각이 든다. 가슴을 함부로 만지고 입에 강제로 키스를 했다? 윽, 이런 직접적인 표현 자체가 내 자신을 더욱 천한 육체로 느껴지게 했다. 나는 그가 움켜쥐었던 내 가슴을 다시 만져보았다. 가슴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좀 전 차안에서의 경악이 다시 몸속으로 번졌다. 나는 서서히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손가락을 서로 겹쳐 깍지를 꼈다. 손가락 29개의 뼈들을 우지직 하고 꺾어보았다. 목을 좌우로 한 번씩 꺾었다 세웠다.
주상도 소장님
소장님의 오늘 행동은 분명 저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의 선배로서 직장의 상관으로서 여자 후배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소장님, 저는 소장님과 연구소 내에서 책임연구원, 연구원의 관계,
학계에서는 좋은 선후배 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 연구원 이두나 드림
맨 마지막 문장 ‘제발 부탁드립니다’는 왠지 비굴한 느낌이 들었다. 커서를 문장의 맨 앞에 가져갔다. 삭제 키를 눌렀다. 제발 부… 까지 지웠다. 손가락을 멈췄다. 아무래도 그냥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제발 부, 를 쳤다. 편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래,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었으면 좋겠다…라고까지 경고성 발언을 했는데 그 다음 문장은 좀 저자세가 필요하겠지?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너무 공격적으로 써서는 예의가 아니고 또 무례하다 생각할 거야. 나는 내가 쓴 편지글을 다시 읽고 다시 읽어보았다. 대체로 침착하고 예의발랐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뒤에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세탁기 안에는 아직 빨래들이 비트 가루와 섞여서 허옇게 된 얼굴로 둥둥 떠 있다. 나는 다시 전기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속도가 서서히 오른다. 배터리 게이지 와트 눈금이 서서히 올라갔다. 세탁기 안에 들어 있는 빨래가 깨끗하게 세탁되면 내 마음도 잘 탈수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마에 조금 땀이 났다. 몸이 뜨거워졌다. 세탁기가 탈탈탈거리며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안방이 조용했다. 한나 언니와 형두는 잠이 든 것일까. 아니면 내가 잠자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연구소 연구동을 지나는데 마음이 불안했다. 주상도 소장의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연구1과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이 복도를 지나 저 문을 지나쳐야 하는데… 나는 주상도 소장 연구실 문에 눈을 떼지 않고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조금 있다 소장의 연구실에서 호쾌한 웃음소리가 났다. 소장 외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복도를 지나쳤다. 소장이 복도를 지나는 나를 불렀다. 소장이 나를 본 게 분명했다.
“이두나 씨? 좋은 아침?”
소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