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후려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 전혀 다른 전파 하나가 들어왔다. 그가 쥐고 있는 강력한 전기의 파괴력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를 제압하고도 남을 높은 와트의 전류. 그것은 나의 현재와 미래에 대단한 에너지와 광력으로 다가올 전류였다.
“소장님, 이러시지 마세요…”
기껏 내가 한 말은 질산 가스를 흡입한 것 같이 허파에 바람 빠진 소리였다. 영 딴 말을 하다니… 목소리는 가녀리고 연약해서 비참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차 문을 열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두운 숲속에 감싸여 있던 아파트가 희미하게 눈알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꽃무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모란 꽃잎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야, 애꿎은 이불은 왜 씹고 난리야?” 형두였다. 언제 방에 들어왔는지 알 수가 없다. 빨래를 하고 있었는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세탁비누를 들고 있었다.
“상관 마!”
“야, 오늘 세탁한 이불이란 말이야.”
“알았다니까.”
“근데, 너 자전거 좀 타라. 세탁기 지금 돌려야 하거든. 난 손빨래가 밀려 있어서…”
“야, 그럼 나보고 30분이나 자전거를 타란 말이야?”
“그럼, 당연하지. 우리 집에서 몸무게 누가 가장 큰 사이즈냐? 그리고 전기 자전거 네가 타려고 만든 거잖아.”
그건 정말 억울했다. 전기료 많이 나온다고 한나 언니가 투덜대서 전기 자전거를 만든 거였다. 연구소 실험실에서 남는 철판과 합판을 가져와서 나사로 잇고 며칠 동안 뚝딱거렸다. 자전거바퀴 회전을 이용해 전기를 발생시키는 거였다. 발생된 전기는 가늘게 주석으로 도금된 구리도체를 통해 배터리에 모여 있다 세탁기 전극으로 보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탁기를 돌리기에 자전기의 전기는 부족했다. 이 몸으로 자전거를 타면 믹서기 정도나 돌릴 수 있다. 세탁기 돌리는 데는 만만치 않은 전력과 지속력이 요구되었다. 결국 베란다에 태양열 전지판을 설치했다. 태양열 전지판에서 전기가 만들어지자 전기는 세탁기도 돌리고 냉장고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전기를 만들어 내다니. 나는 자랑스러운 프랑켄슈타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
세탁기를 돌릴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손가락이 다 잘린 목장갑을 꼈다. 자전거 시트 위에 앉았다. 서서히 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바퀴가 돌아가자 양다리는 바퀴에 매달린 어떤 강박처럼 돌기 시작했다. 호텔 바에서 17년산 발렌타인을 마신 것처럼 의식이 약간 비틀거렸다. 나는 자세를 다시 곧추 세웠다. 세상에서 어떤 것보다 훨씬 강하고 빠른 전기를 만들기 위해 나는 바퀴를 돌렸다. 바퀴살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속도가 나자 자전거에서 휙휙 바람이 일었다. 배터리 게이지가 왔다갔다 하더니 15볼트로 올라가고 있었다. 양발이 세상에서 사라진 듯 가벼워졌다. 대신 의식이 점점 무거워져 바닥으로 녹아 흐르고 있었다. 세상이 나와 이상한 낙차를 갖고 제 혼자 돌고 있었다. 나는 양 팔뚝으로 세게 입술을 닦았다.
소장을 대단한 엘리트에다 유능한 상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다. 성적으로 무례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는 하급자의 성적 권리를 함부로 대했다. 그것도 무례하고 난폭하게.
입술에서 약간의 피가 났다. 그가 세게 움켜쥔 오른쪽 가슴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혀가 잘린 듯 아파왔다. 이건 순수한 성적 모욕이다. 모멸감이 온몸에 흘렀다.
어떻게 해야 한다?
직장 상사에게 아부하는 것은 미래 장기 보험을 드는 일이다. 하지만 직장 상사에게 성적 모욕을 당하는 것은 어떤 선택 앞에 서게 되는 일이다. 적립식 펀드를 계속 들 것인지 깰 것인지 하는. 적어도 그는 나의 미래였다. 계약직의 현실을 쥐고 있는 당사자였다.
아니ㅡ 다시 생각해보자. 그가 나를 꼭 모욕하려 한 게 아닐 것이다. 그는 MIT 공대 수재다. 한국 미래 과학자 십 인에 속하는 엘리트다. 다만 뭐랄까,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떤 거친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터져 나온 게 아닐까. 그래, 이건 단순한 실수일 수 있다.